- “8월 15일 해방의 만세 소리는 없었다”
오늘은 제69주년 광복절입니다. 광복(光(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復(회복하다, 되돌리다)이라는 한자를 보면 빛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1945년 8월 15일 빛을 다시 찾았다는 의미의 광복절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입니다.
우리는 광복절이 단순히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라고만 알고 있지, 이 당시 벌어졌던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광복절과 관련하여 착각하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겠습니다.
▲ 이미지출처='아이엠피터' 블로그 |
① 8월 15일 해방의 만세 소리는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서울역에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알고 있고 단기4278년 8월 15일이라고 표기된 이 사진은 실제로는 1945년 8월 16일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현재까지 1945년 8월 15일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는 사진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니 왜 해방이 된 그날의 감격을 기념하는 사진이 없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육성 방송이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나왔는데 왜 조선인들은 해방을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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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당시 조선 내 라디오 보급률을 보면 일본인들은 71.8%였지만, 조선인은 겨우 3.7%만이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라디오를 들었다고 쳐도 일본 천황의 육성 방송은 목소리 상태가 좋지 않았고, 일본 황실어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인 방송 기술자들과 아나운서들이 해설방송을 반복해서 해줬기 때문에 겨우 해방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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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아침에서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고,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는 사진들은 대부분 1945년 8월 16일에 촬영된 사진들입니다. *
문제는 8월 16일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8월 15일 사진이라는 설명이 있는 사진들이 버젓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왜 우리가 8월 15일 광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② 일본군은 8월 15일 해방이 됐어도,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으니 일본군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해방된 8월 15일이후에도 계속해서 무장을 하고 조선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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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즈음 조선 총독부와 조선 주둔 일본군은 여운형의 건군준비위원회에(건준) 치안권 등에 대해 합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가 훈령으로 미국 군대 이외에는 그 누구도 권한을 이양하지 말라고 지시하자 돌변했습니다.
일본군은 건준이 치안과 권력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고, 무장한 일본군 등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계속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해방됐지만 일본군이 계속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반발하여 유혈 충돌이 일어났지만, 조선 총독부와 일본군은 하지 중장에게 건준이 소련과 손을 잡고 있다는 식의 정치 공작을 펼치며 미군의 지지를 받으며 무장을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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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무장해제는 미군이 진주하는 9월 9일 이후부터 순차적으로 시작됐습니다. 9월 12일 17방면군사령부 해체를 시작으로 철수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무기와 탄약을 미군의 감독하에 파기하거나 바다에 버렸습니다.
일본군의 무장에 대한 자위권과 조선 국군을 준비하기 위했던 조선 지도자들의 ‘국군준비대’는 미군정에 의해 모두 해산당했으며, 오히려 하지 중장은 일본군 출신을 우대하여 조선국방경비대에는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③ 해방이 됐지만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게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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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됐지만, 조선인들은 수탈과 억압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에 태극기를 달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앞서 설명한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미군이 올 때까지 치안권을 유지하며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조선인들은 남산에 태극기를 달았습니다. **
미군이 진주하고 조선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일장기가 내려집니다. 그러나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게양됐고, 성조기는 미군정이 끝나는 1948년까지도 걸려 있었습니다.
④ 조선 미군정 최고 통치자 존 하지 중장은 조선을 싫어 했다.
우리가 광복절을 기억한다면 꼭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이 있는데, 바로 존 하지 중장입니다. 하지 중장은 해방된 조선을 다시 지배한 군정청 최고 통치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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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지 중장은 미군정 최고통치자로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는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본 주둔 미군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이어-리아(diarrhea 설사) 두 번째는 고오너-리아(gonorrhea임질), 그리고 마지막은 코-리아(Korea한국)이다”
설사와 임질보다 한국을 두려워했으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교활한 종자(The Koreans are the same breed of cats as the Japs)” 라고 말했던 그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도 무려 3년 동안이나 조선을 통치했다는 사실은 왜 광복절과 더불어 그를 알아야만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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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지가 군정청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조선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오키나와 주둔 24군단 사령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전군 사령관으로는 뛰어났지만 해방된 조선을 제대로 이끌기에는 맡은 바 역할에 비해 정치력이 부족했었습니다.
존 하지가 광복절과 중요한 연관성이 있는 이유는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그의 군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친일청산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보다 조선총독부를 더 신뢰했던 그는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친일파 등을 동원하여 그저 군정만을 유지하기 바빴을 뿐 조선인들의 역사 바로 세우기 등의 정통성 확립이나 미래에는 무관심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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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중장이 미군정 통치기간 친일파들이 대거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중국이 한간(친일파) 359명을 프랑스가 나치협력자 767명을 사형시켰지만, 한국은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반민특위를 통해 친일파 청산을 시도했었지만, 이미 이승만 정권과 함께 경찰, 사법부, 군조직을 장악했던 친일파들은 무력으로 반민특위를 해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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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되면 일제에 충성하며 같은 민족을 고문하고 괴롭혔던 친일파들이 무너지고 제대로 된 자주 독립국가를 세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여전히 권력을 장악했으며 ‘불령선인’ 이라는 말 대신'빨갱이'라는 말로 독립지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도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 대신 성조기가 걸렸고, 미군정은 조선의 자주국방을 막기 위해 점령군의 역할에만 몰두했습니다.
광복절에 담긴 역사만 제대로 알아도 왜 대한민국이 아직도 ‘전작권’을 미군으로부터 돌려받지 않고 있으며, ‘종북’이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리포터 ‘아이엠피터’ 블로그 바로가기)
* 1945년 8월 15일에 촬영된 사진이 발견된다면 역사적 가치는 굉장히 높을 것이다.
** 남산에 태극기를 게양한 사진은 8월 25일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리포터 아이엠피터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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