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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송원근 감독 “할머니가 남긴 숙제, 우리가 완성해야”

기사승인 2019.05.13  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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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광의 발로 GO 인터뷰 337] 다큐 영화 <김복동>의 송원근 감독

20회 전주 국제 영화제 상영작인 다큐 영화 <김복동>이 화제다. 영화 <김복동>은 한국 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가 제작한 세 번째 영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을 상대로 한 투쟁을 기록한 영화다. 내레이션을 배우 한지민 씨가 맡아 더욱 이슈가 되었다. 

다큐 영화<김복동>은 전국 국제 영화제에서 6일, 8일, 10일 등 세 차례 상영되었다. 자신이 제작한 첫 영화를 극장에서 본 소감이 어떨지 궁금해 첫 상영한 8일 저녁 전주에서 <김복동>을 연출한 뉴스타파의 송원근 PD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송원근 PD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다큐 영화 '김복동'의 송원근 감독 <사진=이영광 기자>

- 여성 인권 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를 주제로 한 다큐 영화 <김복동>이 6일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어요.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인데 소감부터 듣고 싶어요.

“처음 영화 제작 제안 받은 게 10월이고 어떻게 만들 것인지 기획한 게 12월인데 이렇게 영화가 만들어져서 관객들 앞에 <김복동>이란 사람을 소개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 얼떨떨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생각이 들어요. 뉴스타파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시는 3만3000명의 후원회원 여러분 덕에 뉴스타파의 세 번째 영화 <김복동>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한지민, 할머니 마음을 눈이 부시게 어루만져준 내레이션”

- 이전에 영화감독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니요. 저는 영화감독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제가 영화감독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라고 생각했어요. 애초 영화 제작을 의뢰받은 게 아니라, 김복동이란 인권활동가의 ‘생’을 정리해볼 수 있겠나는 제안을 받고 작업을 계획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슨 철없이(?) 영화감독이 돼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제작이 진행될수록 제가 느낀 할머니에 대한 감정을 다른 사람도 함께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기왕 김복동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 거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긴다는 마음으로 영화가 될 수 있도록 제작해 보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다큐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 <사진=전주국제영화제 제공>

-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완성된 작품을 보는 건 처음이셨을 텐데 어떠셨어요?

“결과물이 큰 화면을 통해 흘러나오는데, 첫 장면부터 굉장히 떨렸어요. 덤덤하게 편한 마음으로 앉아서 볼 수 없더라고요. 영화 시작하고 차분해 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아요.” 

- GV(관객과의 대화)도 하셨잖아요. 관객 반응은 어땠어요?

“관객 분들 하는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이 ‘나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니 내가 몰랐구나란 생각이 들었다’라는 거였어요. 실제 그게 저희가 이 작품을 제작한 이유이기도 하거든요. 살펴보니 많은 분들이 저희 제작진과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화가 완성되어 갈수록 ‘아, 내가 안다고 자신하고 살았던 게 오만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실제 영화제를 통해 영화를 많은 관객분들이 비슷한 반성을 한 것 같아서 뿌듯하다고 할까요.” 

- 제안이 와서 만들기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처음 제안이 왔을 땐 어땠어요?

“제가 처음 할머니의 투병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2월, 미디어몽구를 통해서였어요. 김복동 할머니께서 말기 암 투병 중이시고, 지금 할머니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고요. 얘기를 나누면서 ‘암 투병 중인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90여 년의 인생 속에서 어떤 시절을 찾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것이 김복동 할머니를 대하는 저의 최초의 호기심이었어요. 인권운동가 김복동의 인간적인 고뇌를 찾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때는 저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고 10월 말경 미디어몽구님으로부터 함께 다큐를 제작하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할머니께 허락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었죠.

급하게 미디어몽구님과 함께 정의기억연대를 찾아 윤미향 이사장과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제작에 관한 기본적인 의견을 나눴어요.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서는 그간 할머니에 관한 기록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죠. 제가 그동안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세밀하게 지켜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어쨌든 기록을 통해 할머니의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정의기억연대, 미디어몽구와 함께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하게 되었죠.

자료실 어디엔가 숨겨져 있는 할머니의 소중한 기록들은 찾는 데만도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어요. 그렇게 찾아서 넘겨받은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고, 미디어몽구가 촬영한 영상들도 잘 살펴봤어요.”

- 자료가 많았을 거 같은데.

“자료의 형태가 굉장히 다양했어요. 지금은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은 6mm 테이프가 상당했고, 다양한 형식의 영상, 오디오 파일, 사진 등이 전해졌어요. 1992년 할머니가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간사였던 윤미향 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과 만나 나눈 음성 파일이 담긴 CD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활동하던 모습이 담긴 사진, 영상 등이 담긴 자료들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할머니의 존재하는 활동사를 대부분 들여다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미디어몽구님이 촬영한 영상들도 분량이 꽤 많았어요.” 

   
▲ 다큐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 <사진=전주국제영화제 제공>

- 정리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 같아요.

“일단 자료의 양이 방대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활동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에 대해서 굉장히 오래 고민했어요. 할머니의 활동을 비롯해서 1992년 이후 한국, 일본, 유엔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는지도 할머니의 기록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정리를 했어요. 예를 들어서 할머니가 처음으로 고백하던 1992년 당시 일본 내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그리고 한국에서는 그 당시 피해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유엔 등 국제사회는 당시 어떤 입장이었는지 등을 동시에 바라봤어요. 할머니의 활동이 결국 이런 일본, 한국, 국제사회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시각을 고집했어요.

그렇게 되니까 2012년, 13년 오사카시의 하시모토 시장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증거가 없다는 등의 막말을 하면 할머니는 그에 대응하기 위해 오사카 시청으로 항의 방문을 간다던가,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이 계속되자 오히려 할머니가 국제사회를 통해 일본을 압박하는 상황 등이 눈에 보이는데, 그런 할머니의 활동 과정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그저 뉴스에서 소식 보던 것과 다르게 할머니의 활동이 굉장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단순히 김복동이라는 사람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고 할머니의 삶 자체만을 보려 하지 않았던 거죠. 그렇게 접근하니 오히려 힘든 활동 속에서 보이는 김복동의 인간적인 고뇌, 회한, 슬픔 등이 대비적으로 감정을 극대화 시키며 다가왔어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김복동이란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것을 정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할머니가 1월에 돌아가셨잖아요. 영화 제작 중 돌아가셔서 안타까웠을 것 같은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당시의 연세가 우리 나이로 94살이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빨리 제작해서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자신의 활동이 담긴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할머니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 할머니 만나신 적 있을 것 같은 데 어떠셨어요?

“할머니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일단 할머니 앞에 서면 어떤 거대한 미안함이 저를 압박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실은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을까 생각도 되지만, 김복동이라는 한 사람의 무게가 저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지난해 11월 28일 할머니의 전 재산을 재일조선학교에 기부하는 행사를 할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실 그때 할머니 방의 문턱을 넘지 못했어요. ‘내가 이 문턱을 넘어서 감히 할머니 곁에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 건가?’란 그렇게 자문했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라는 말이 그냥 말그대로 우리 모두가 아는 할머니가 아니라 ‘김복동 할머니’라고 고유명사화 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무거운 느낌, 제가 과연 이분의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할머니를 보면서 가졌어요.” 

- 영화 얘기하셨을 때 뭐라고 하시던가요?

“미디어몽구와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가 할머니께 할머니의 모습을 미래세대도 보고 알 수 있도록 영상으로 남긴다고 하셨고, 할머니께서 ‘내가 죽더라도 나의 이 이야기를 미래의 아이들이 알 수 있길 바란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 배우 한지민 씨가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던데.

“한지민 씨는 2017년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기억의 터 1주년 행사에 함께 참석하신 인연이 있는데요. 영화 제작 하면서 당시 영상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런 인연이 있다면, 내레이션 제안을 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서, 소속사에 연락을 드렸고 영화의 기획안과 시놉시스를 보내드렸어요.

한지민 씨가 후에 ‘김복동 할머니 이야기니까 해야지’라며 승낙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내레이션 녹음하는 현장에서 한지민 씨가 당시 행사장에서 김복동 할머니 손을 조금 더 못 잡았단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시더라고요. 당시 행사장에서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어요.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지민 씨가 할머니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마음으로 내레이션을 하면 좋겠다는 말 정도만 나누고 바로 녹음에 들어갔어요. 영화를 보신 분들 모두 내레이션이 너무 좋아서 누구지 궁금했다가 나중에 한지민 씨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시더군요.” 

   
▲ 배우 한지민씨 <사진출처=사운드스튜디오 좋은날 대표 인스타그램>

- 녹음 과정은 어땠어요?

“저도 그날 한지민 씨를 처음 봤는데요. 한지민 씨가 눈물이 많으신 것 같더군요. 그런데 ‘나는 오늘 녹음하면서 결코 울지 않을 거야’를 백번쯤 다짐하고 녹음실에 오신 분의 표정이었어요. 최대한 감정동요를 줄여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굉장히 저에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영상은 아예 보지 않고 녹음을 하셨는데, 그것도 생소했죠. 오직 내레이션 원고에 써진 내용을 통해 이해하고 느껴서 그것을 그대로 목소리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래서 배우는 배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할머니의 마음을 따뜻하게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어루만져 준 내레이션이 아니었다고 저희는 평가했는데, 관객들도 그렇게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수십년 지나 억울함·한을 풀어보려 나선 할머니의 싸움에 공감하는 영화”

- 위안부 이야기는 자칫 무거울 수도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기존의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대부분 전쟁 당시의 참혹한 상처, 일본군의 만행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죠. 그러나 <김복동>은 그런 상처 입은 과거의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시절을 오롯이 견뎌낸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다들 백발의 노인이 됐을 때 자신이 당한 억울함과 한을 풀어보기 위해 나섰던 일이 얼마나 애처롭고 외로운 싸움이었는지, 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그 할머니의 싸움을 지켜보면 막연히 슬프다는 감정이 아닌 화가 나면서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대를 아울러 할머니의 싸움에 대해 ‘공감’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후 8월 개봉할 때 저희 홍보도 아마 기존의 일본군 ‘위안부' 영화들과 다른 영화라는 것을 부각하면서 관객들에게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영화에서는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만 나오는 장면도 있던데 이유가 있나요?

“1992년 할머니가 처음 자신의 피해를 고백하는 녹음 파일이에요. 테이프에 담겨 있던 파일이 디지털로 변환 되어진 파일인데요. 27년 전 녹음이 진행되던 그 당시 할머니의 감정, 답답함, 애처로움, 먹먹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여서 굳이 영상이 없어도 목소리만으로도 관객에게 그 느낌을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제작진이 받은 느낌을 관객들도 고스란히 받게 되길 바랐습니다.” 

- 2011년, 평화비 (평화의 소녀상) 건립도 세세히 다루시던데요?

“제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2011년 당시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한 활동들이 주춤하던 시기였다고 해요. 20년 가까이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곳도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던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할머니들의 잃어버린 시절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세워졌어요. 일본정부의 견제가 심했고, 한국정부도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자 이상하게 시위현장에 학생들이 더 많이 찾게 되고,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거든요. 김복동 할머니 뿐만 아니라 다른 할머니들도 그렇게 위로받았고, 자신들의 활동이 정당했다고 인정받게 된 계기가 바로 평화의 소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 영화를 통해 할머니의 어떤 모습을 주로 담으려고 했나요?

“영화를 통해 저희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김복동이라는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가 어떤 마음으로 활동에 나섰고,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법적 배상을 위해 노력했는지를 관객들이 느끼게 하고 싶은 게 가장 컸습니다. 김복동이라는 사람이 왜 갑자기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어느 순간 갑자기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 지금까지 김복동이라는 운동가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최대한 존중하는 선에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취재하시면서 느끼시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물론 ‘김복동’이라는 인권운동가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할머니의 숨겨진 삶을 찾아가면 갈수록 할머니의 삶이 ‘바위처럼'이라는 민중가요의 가사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노래는 지금도 수요시위에서 불리고 율동하는 노래거든요. 노래 가사 중 특히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이라는 부분을 들을 때면 김복동이라는 사람이 이 활동을 위해 얼마나 자신을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견디어낼 준비를 단단히 했는가가 느껴졌어요. 특히 작업이 막바지로 가면 갈수록 ‘바위처럼'이라는 노래가 가슴이 박혀왔습니다. 그만큼 김복동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영화 '김복동' 포스터

- 영화 <김복동>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아요. 김복동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생존해 있는 피해 할머니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제라도 남아있는 우리가 할머니의 뜻을 느끼고 이해해 김복동이 남긴 숙제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지난 30년 가까운 활동에 대해서 함부로 안다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안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찌 보면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느끼고,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가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일본정부가 농락하듯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났다고 주장하는 지난 2015 한일합의가 얼마나 피해자를 농락하는 합의인지를 이 영화를 본 분들은 알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 개봉이 8월이잖아요. 스토리 펀딩하실 계획이신가요?

“스토리펀딩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제 영화가 만들어졌고,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대중에게 첫 선을 보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어떻게 홍보하고 알릴 것인지는 지금부터 해나가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GO발뉴스>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GO발뉴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영화 <김복동>을 연출한 송원근입니다. 생전 김복동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서로서로 돕는 연대의 마음을 중히 여기셨습니다. 영화 <김복동>이 세상에 선을 보이고 이제 몇 달 후에는 관객 여러분들 곁으로 찾아갈 텐데요. 이 영화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서 김복동의 뜻과 마음이 널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관심이 절실합니다. <김복동>을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나가는 데 동참해주시길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영광 기자 

이영광 기자 kwang38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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