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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주년을 썰렁하게 보내는 나라가 또 있을까?”

기사승인 2019.04.19  14: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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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광의 발로 GO 인터뷰 330] 이재석, 이세중 KBS 탐사보도부 기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 11일 KBS는 아주 특별한 보도를 했다. 바로 임시정부 초기 요인들이 모습이 담긴 사진에 대한 것이었다. 국회 전신인 임시의정원 2대 의장인 손정도 목사의 의장 취임 후 찍을 거로 추측되는 이 사진은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등 알려진 독립 운동가들의 젊은 시절은 물론 임시정부 숨은 주역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 취재 뒷이야기가 궁금해 사진을 발굴해서 보도한 KBS 탐사보도부의 이재석, 이세중 기자를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KBS 사옥에서 만나 사진 발굴과 곽윤수 선생 후손 만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이재석(우), 이세중(좌) KBS 탐사보도부 기자. <사진=이영광 기자>

- 삼일절에 이른바 ‘3.1운동 계보도’에 이어 임시정부 100주년이었던 지난 4월 11일 임시정부 초기 단체 사진을 발굴하셔서 보도하셨잖아요. 보도를 마친 소회가 궁금합니다.

이재석 기자(이하 재): “올해가 뜻깊은 해잖아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죠. 둘은 각각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1919년 전국 각지에서 민초들이 일어나 3.1운동을 일으켰고 그 동력이 상하이로 전해져서 임시정부가 4월 11일에 수립된 거죠, 100년을 맞는 올해가 굉장히 중요한 해인데 중요한 해에 발굴 보도를 두 번 연속으로 하게 되어 나름대로의 보람이 있습니다. 운 좋게도 해당 시점에 맞춰서 주제가 딱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고요. 다만, 요즘 추세랄까요. 역사에 관심이 덜하잖아요, 사회적 논의도 역사 분야에서는 깊이 있게 진행되지 못하는 측면이 많아 아쉽죠.”

이세중 기자(세): “학계에서도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한 자료라고 얘기해주고 실제 아직 사진에 나온 분들이 누군지 안 나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사료가 어떻게 쓰일지도 궁금하기도 하고요.

이재석 기자도 말했지만, 아쉬운 점이 이날 언론사에서 임정 수립 100주년 관련 보도가 많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다른 사회 이슈가 많아서 그런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도 새로운 단독 발굴이나 혹은 기획 보도가 많지 않았습니다.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저희 보도가 충분히 회자되지 못해 아쉬운 면이 있죠. 그래도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 손정도 목사의 임시 의정원 의장 취임 기념 행사로 추정”

- 그럼 왜 관련 보도가 많지 않았을까요?

재: “제가 우스갯소리 섞어 가며 이야기해 볼게요. 만약 독일이나 프랑스 같이 역사를 기리는 데가 있어서 사회적 에너지를 많이 쏟는 유럽 국가가 본인들의 임시정부 혹은 망명정부 100주년을 기념한다면 아마 몇 주 동안은 모든 언론이 그 얘기만 할 겁니다. 물론 언론이 한쪽으로 쏠리는 게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지난 4월 11일 방송 4사라 불리는 언론사 메인 뉴스를 보면, KBS 말고는 몇 개 리포트만 보도하다 끝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날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도 나왔고 다음 날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슈가 많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100년을 이렇게 ‘썰렁’하게 보내는 나라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아까 말한 유럽 국가에서 망명 정부 100주년을 맞는 날이라면 아마도 사법부 최고 기관에서 그런 중요한 결정을 일주일이라도 연기했을 겁니다(웃음). 임정 100년은 건 뜻깊은 날인데 언론 보도나 사회적 에너지, 관심이 생각보다 크진 않았던 거 같아요.” 

   
▲ <이미지 출처=KBS 화면 캡처>

- 시청자 반응은 어땠어요?

세: “보도가 나가고 포털사이트 카페라든지 트위터 같은 데에서 링크 걸거나 보도를 언급하며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어떤 뉴스에 대해 당파적으로 갈리거나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이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고 의미 있게 봐주셨어요. 임정 초기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이 더 밝혀져야 한다든지 혹은 여러 가지 놓친 부분이 많으니까 독립유공자를 더 발굴해야 한다는 식의 글이 많았어요.”

재: “특히 대중들도 지난번 3.1운동 계보도와 달리 이번에는 사진으로 인물들 얼굴이 직접 나오니까 더 정서적으로 반응해 주시는 거 같습니다. 학계나 유관기관 관심이 특히 높아요. 지난번 3.1운동 계보도나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학계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사료들이기 때문에 학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보훈처 등 유관 기관에서 매우 관심을 보이며 자료와 취재 내용을 공유해달라고 요청해요. 반응이 뜨거운 거 같아요.” 

- (우리나라의 발굴 작업이) 늦은 건 아닐까요?

재: “늦었죠. 그런데 일본이든 중국이든 자료가 정말 많아요. 중국은 잘 오픈되어 있지 않고 일본은 그나마 오픈된 편인데도 워낙 일제 강점기 시절 쌓아두었던 기록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그동안 정부 기관에서 많이 가져오고 수집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 발굴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이걸 발굴하려면 결국 돈, 인력, 시간의 문제거든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오는 게다행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발굴할 게 많죠.” 

- 앞서 공교롭게 4월 11일에 보도를 했다고 하셨는데 일부러 시점을 맞춘 게 아닌가요?

세: “계기성이 있어야 뉴스가 파급력도 있고 소비도 잘 되잖아요. 임정 100주년이 되는 날 무언가 보도하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어요. 하고 싶다고 뭐가 나오는 건 아니죠. 다행히 취재하다가 관련 내용을 알게 됐고 한 달 정도 취재하면 임정 수립일에 맞춰 보도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바짝 붙어 취재했죠.” 

- 계보도와 비슷한 시기에 발굴했지만, 보도 시점을 조정한 게 아닌가요?

재: “3.1운동 계보도는 작년 가을에 입수했고요. 이번에 보도한 임정 초기 사진은 출처가 어디인지 알고는 있었어요, 그러나 입수 시점은 계보도 보도 이후예요. 삼일절 전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직접 수집할 수 없었고요. 4월 11일 보도가 필요하니 그 사이 제가 서둘러 일본을 다녀왔고 이세중 기자는 상하이에 다녀왔죠.” 

- 처음 사진 봤을 때 어떠셨어요?

재: “사진이 생각보디 선명하더라고요. 사진이 흐릿하거나 화질이 안 좋으면 추적이 힘들잖아요. 그러나 사진 오른쪽 남성들로 갈수록 원본을 확대해서 보면 얼굴 식별이 가능해요. 알아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많이 특정하진 못했지만 시민 제보라든지 학계에서 분석이 더 나오면 더 특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해요. 저는 선명성에 놀랐고 반가웠죠.”

세: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오는 사진이 거의 없다 보니까 흥미로웠어요. 촬영 시기는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거처를 옮긴 직후고 그냥 찍은 게 아니라 날을 잡고 찍은 거예요. 복장도 차려입고 가족도 같이 찍은 거로 봐서는 어떤 날을 기념하고 의지를 다지고 상해로 넘어온 독립운동가들이 뭔가를 기념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어요.” 

- 보도를 보니 손정도 목사의 임시 의정원 의장 취임 기념으로 추정하시는 거 같아요.

재: “그게 전문가들 진단입니다. 손정도 의장이 남자 중에서 가운데쯤 앉아있거든요. 물론 종합적으로 봐야 합니다. 첫째 이 사진이 밀정에 의해 입수되어 일제 내부에서 보고된 게 1919년 7월 9일이에요. 그럼 사진을 찍은 건 그 전이고 복장을 보면 여름이 오기 전이에요. 남자들 가운데엔 손정도 목사가 앉아 계시죠. 전문가들 추리에 따르면 1919년 4월 30일 손정도 목사가 2대 임시 의정원 의장(국회의장 격)으로 선출되거든요. 그날이나 그다음 날 취임을 기념하는 행사였을 거라는 거죠.”

   
▲ <이미지 출처=KBS 화면 캡처>

- 사진 속에는 남성 178명, 여성과 아이들 47명 등 모두 225명이 등장하잖아요. 아마도 가족까지 다 포함된 거고 당시엔 남성 중심이었을 테니 임시정부 요인은 178명으로 봐도 될까요?

재: “꼭 그렇진 않은 거 같아요. 물론 당시 시대적 한계가 있어서 임시정부가 남성 중심적으로 운영됐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진 왼쪽에 있는 여성들의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임시정부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거나, 또는 그 가운데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하셨던 분도 있을 게 분명합니다. 다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거라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부분입니다. 따라서 남성만 임시정부 요인으로 보긴 힘들 거 같아요.

그리고 전문가들 말을 종합하면, 남성 178명의 경우에도 관여 정도나 직책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언급해야 할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중책을 맡으신 분도 있을 거고, 저희 보도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데 중책은 아니더라도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젊은 실무자들이 상당수 있다고도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진 속에 있는 거죠.” 

- 보도를 보니 사진 있던 게 1919년에서 1921년 하반기까지 3.1운동에서부터 비롯된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관해서 정리해놓은 문서철이라고 나오던데 이 사진 말고도 다른 자료가 있을 거 같아요.

재: “문서철이 <조선소요사건 관계 서류>라는 책입니다. 모두 7권, 만 3천여 페이지로 돼 있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두꺼워요. 내부 보고서라 당연히 일본어로 된 책이에요. 이걸 다 일일이 해독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일본 방위연구소에는 이런 자료가 수두룩하고 방위연구소뿐 아니라 외무성, 국회도서관, 각 대학교 자료실 등 일본 이곳저곳에 아직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사료가 널려 있습니다. 워낙 양이 방대해 보고문 내용을 일일이 번역하는 것은 결국 돈, 인력, 시간 문제입니다.

당연히 더 많은 자료가 있겠죠. 그래서 사진 자료는 역설적으로 눈에 더 띕니다. 글이 아니잖아요. 글은 하나하나 해석하려면 오래 걸리는데 사진이나 도표가 중간에 끼어있으면 눈이 먼저 그곳으로 가잖아요.(웃음) 그러니 저희가 보도한 계보도나 사진은 눈에 상대적으로는 더 잘 띄긴 하죠. 그러나 자료가 너무 많아서 사진이나 계보도 자료조차도 이제야 발굴되는 거고, 자료는 여하튼 많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이미지 출처=KBS 화면 캡처>

“예전만큼 ‘사료 발굴’ 탐사보도 주목 못받아 안타까워…계속 이어가야”

- 이 사진이 어떻게 일제로 넘어간 건지가 중요할 거 같거든요. 보도를 보니 곽윤수 선생 처남으로 하여금 은밀히 밀정에게 가져오게 한 거라는 내용이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한 취재는 불가능한 건가요?

세: “보고서에 나온 걸 직역하면, 일제의 밀정이 곽윤수의 처남으로 하여금 사진을 몰래 가져오게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제가 고용한 밀정이 누군지, 정확히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곽윤수와 밀정 간 관계라든지 어떤 경위로 줬는지 나와 있지 않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추정이에요. 최소한, 이 밀정이 곽윤수 선생 집안에 이런 사진이 걸려 있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고, 밀정이 이런 부탁을 해도 곽윤수 선생 처남이 들어줄 만큼의 관계였다고 볼 수 있죠. 이 밀정이 독립운동가의 주요 사무소였던 곽윤수 선생 집과 그 주변에 깊숙이 관여된 인물이었을 거라고 추정 가능하죠. 따라서 밀정은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거죠. 누군가 부탁으로 사진을 건네준 건데 일본인이라면 이 부탁이 쉽지 않겠죠.

곽 선생 처남이 어느 정도 개입됐는지 단언 지을 순 없을 거 같아요. 단순한 부탁을 받고 보여준 것일 수도 있고, 또 조심스럽지만 곽 선생 처남 자체가 밀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죠. 왜냐면 일제는 주요 독립운동가들 가족이나 지인을 밀정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고 실제 그런 사례가 적지 않죠.” 

- 곽윤수 선생 따님과 외손주를 만나셨잖아요. 뒷이야기가 있을 거 같은데.

세: “제가 만난 분이 곽 선생의 첫째 따님인 곽종옥 할머님과 손자, 증손녀분이에요. 그분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자긍심만큼은 굉장히 높아요. 그분들은 곽 선생이 상하이에 가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평생 상하이에서 사셨고 국적도 중국이에요. 15~20년 전 즈음 집안에서 증손녀에게 한국에 가는 걸 권했다고 해요. 곽 선생님 자료를 찾아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증손녀분이 15년 전 즈음 한국으로 넘어와서 한국어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도서관 등을 뒤지며 곽윤수 선생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 보훈처 등에서 자료를 찾은 끝에 결국 후손들이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보훈 신청을 해서 2010년 뒤늦게나마 곽 선생이 서훈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인터뷰하면서 곽 선생의 집에서 사진을 전달한 처남 이야기를 꺼낼 때는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우려를 했는데요. 다소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곽 선생의 업적과는 별개의 일이고, 역사 속에서 벌어진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것 역시 곽윤수 선생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 중 하나라고 받아들여 주셔서 저희는 참 감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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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KBS 화면 캡처>

- 곽윤수 선생은 잘 안 알려진 분인데 어떤 분이었나요?

세: “곽윤수 선생은 상인이세요. 당시 경성에 사시다가 1916년 무렵에 상하이로 건너가셔서 인삼 장사를 하셨고 장사가 잘 됐나 봐요. 자기 집을 조선인 교민단 사무실로 제공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죠.

임정이 거처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인데 잘 찾지 못했어요. 이때 곽윤수 선생이 임시로 자기 집을 임정 사무실로 내준 거죠. 1919년 4월 말부터 3개월 동안 곽 선생 집을 임시정부 사무실로 사용하거든요. 아까 말씀드린 손정도 선생이 의장으로 되신 의정원 회의도 곽 선생 집을 사무실로 쓰던 기간입니다. 저희가 추정컨대 사진을 찍은 게 4월 말이라고 하고 시기로 봤을 때 곽 선생 집이 임시정부 사무실로 쓰였던 시기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큰 사진을 걸어놓지 않았나 추정해볼 수 있고요. 이 분은 계속 임시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시면서 한국 가서 정보원 역할도 하시고 한 공로가 있거든요. 그런 걸 인정받아서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죠.” 

- 지금은 그 집터가 없어졌나 봐요?

세: “거기가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옛날 집이 남아 있었대요. 그러나 중국 당국이 개발하면서 거리를 바꿨어요. 그 당시 흔적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장안리 267번지가 곽윤수 선생 집인데 주변에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들이 사셨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다 밀어서 흔적 자체가 안 남아 있어요.” 

-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을 거 같아요.

재: “사료 발굴은 탐사보도의 중요한 한 축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를 거친 한국의 경우 ‘기록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정말 척박하기만 한 게 현실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조금씩 기록 보존 문화가 정착되지만, 아직 부족하죠. 우리나라 특수성을 감안할 때 탐사보도 기자들이 ‘사료 발굴’이라는 탐사보도의 한축을 방기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최근 뉴스 소비문화가 달라져서 사료 발굴을 토대로 한 묵직한 탐사보도가 예전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올해가 100주년이라 다른 때보다야 주목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관심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탐사보도는 꾸준히 지속되어야 하죠. 시간-인력-정체성이라는 다양한 차원을 고려해 봤을 때 그런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KBS밖에 없다고도 감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기자, 또는 PD들이 후속 취재를 이어가야 합니다.”

세: “현재 정부 방향도 그렇고 임시정부 100주년 맞아서 그간 챙기지 못한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발굴한다는 방침이잖아요. 실제 독립운동가 중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분도 많고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하다 해외로 망명하신 분들이나 사라진 분이 많거든요. 우리가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그분들의 행적과 기록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이 쉽게 마련되지 않았어요. 단순히 이런 기록을 수동적으로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학계에서 연구를 더 많이 하고 언론도 더 파고들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게 앞으로 과제인 거 같아요.” 

- 취재하는 부분이 더 있나요?

재: “이세중 기자와 제가 8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상황이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2부작을 준비하거든요. 큰 프로젝트예요. 작년부터 준비했거든요. 그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게 저희 목표고 그 다큐멘터리 주제는 밀정입니다. 이번 보도에서도 밀정이 개입해서 사진을 빼낸 스토리가 있잖아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조선인 밀정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고 관련 취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GO발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재: “계속 KBS 얘기를 해서 좀 그렇긴 한데 KBS가 가진 강점이 있거든요. 인력이 많고 수신료라는 안정적 재원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발굴하는 보도는 공영방송 KBS가 더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이에요.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이런 정서가 더 자리 잡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세: “전문가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올해 100주년이 끝나면 더 걱정이라는 거예요. 모든 관심이 끝날까 봐요. 많은 기획 보도가 나오고 있고 관심을 쏟고 있는데 사실 우리가 독립운동이나 친일 등 역사적으로 발굴을 못 하거나 정리 못한 게 너무 많잖아요. 그런 건 100주년인 올해만 해야 되는 게 아니라 올해를 계기로 삼아 앞으로 이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영광 기자 

#이상호의_뉴스비평 https://goo.gl/czqud3

이영광 기자 kwang38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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