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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 그가 남긴 유산.. “자네, 싸움에서 이길 자신 있나?”

기사승인 2018.04.30  14: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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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상만의 GO발뉴스] 1991년 3월, 또 다른 내 아버지 ‘그 분’을 만나다

제 장인 어른이 지난 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날 밤 새벽 1시에 걸려온 위독하다는 소식. 전날 가벼운 폐렴 증상으로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주말에 병문안을 가야겠다는 말을 아내와 나눈 후였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덮쳐온 위독하다는 소식에 저는 멍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 나의 장인어른 장대봉 님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평소 아껴주시던 딸아이를 깨워 병원을 향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그러하듯 이것이 정말 끝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동차 악셀을 밟았습니다. 아내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입원하시면서 경고등이 켜졌다가 꺼진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잠시 후 괜찮다는 전화가 올지 모른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고양시에서 춘천까지 내 달리는 1시간 여 지나도록 기다렸던 전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결국 아내는 아버님을 잃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병원에 있는 처남에게 아내가 전화를 하자 조금 전 운명하셨다는 비보가 전해진 것입니다. 오열하는 아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저는 오래전 아버님을 처음 뵈었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1991년 3월, 그분을 만나다 

   
▲ 1991년 당시,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고상만.

처음 제가 장인어른을 뵌 때는 1991년 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운동권이었던 저는 1990년 운동권 동료가 의문사로 숨지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91년에는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며 또 다른 동료가 분신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점거농성이 이어지던 그때, 교수의 연락을 받고 학우의 부모님들이 딸을 찾으러 농성장으로 오셨습니다. 딸을 찾으러 오신 부모님들은 함께 농성중인 남학생들의 따귀부터 때렸습니다. ‘저 놈이 우리 딸을 꼬셔서 데모를 한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다음번엔 누가 따귀를 맞을까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농성장에 아무도 없이 저 혼자 있을 때였습니다. 50대로 보이는 초로의 남자 분이 농성장으로 들어오신 겁니다. 그 분을 뵈며 저는 속으로 ‘아. 오늘은 내가 따귀를 맞는 날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단 그 분에게 “좀 앉아서 제 이야기를 잠시 들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순간에 따귀가 한대 날아오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오신 다른 부모님과 달리 이 분은 정말로 제 말처럼 권한 자리에 앉으시는 것 아닌가요. 그때까지 그 어느 아버지에게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딸이 ‘빨갱이 남자 새끼들의 꾐에 빠져’ 데모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그렇게 앉은 그 분에게 저는 진심을 다해 왜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싸우는지 말씀드렸습니다.

부정과 비리, 그리고 반민주적인 학원의 작태와 이로 인해 한 해 전 학생회장이 의문사한 경위를 진심을 다해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에 분노한 동연 회장이 분신 항거로 저항한 시간들을 전하며 “결코 저희가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살아오며 가진 생각이 이런 몇 마디 말로 설득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잠자코 제 설명을 듣던 그 분이 감감히 계시더니 “한마디만 해도 되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아, 이제부터 이 분이 반박을 하시려나보다’ 생각하며 저는 그 분을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 분의 말씀.

“무슨 수를 쓰든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나”, “정 안되면 학교 앞 차도를 점거해서라도 꼭 이겨야 한다.”

뜻밖의 말씀에 저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재차 “이길 자신 있느냐”는 다그침에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상과 달리 돌아가는 이 모든 상황이 얼떨떨했습니다. 그래서 가시는 그 분을 i아가 “여기까지 오셨는데 따님이라도 만나고 가셔야 하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좀 전에 농성장에 들어오다가 얼핏 딸아이를 봤는데 나를 보더니 어디론가 피했다”며 “자기도 생각이 있어서 그럴 텐데 굳이 가지 않으려는 딸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겠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궁금한 한마디를 여쭸습니다.

“아버님. 그런데 왜 꼭 이 싸움을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부모님은 처음이라서...”

그러자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일이 커진 상황에서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내 딸도 무사하지 못할 것 아닌가. 구속이 되든, 아니면 학교에서 제적이 되든할텐데, 만약 이기면 그런 피해를 당할 일은 없을 테니 부디 자네들이 꼭 이겨야 하네. 반드시 꼭 이겨야 해.”

   
▲ 1991년, 치열했던 당시의 기억

하지만 그해 봄, 저는 이 분과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91년 그때의 싸움은 우리의 패배로 끝났고 저는 그 여파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일제 때 지은 지하 감방에서 저는 ‘꼭 이겨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농성장에서 뵌 그 여자후배 아버지의 말씀을 내내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나온 후 늦었지만 그 분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후 감옥을 나와 저는 인권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그때 잘못한 학교 재단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이어 제적된 학교에서 복적 되어 장학금까지 받고 졸업을 하였고 이후 그 분의 사랑받는 막내 사위가 되었습니다. 장인어른과 막내 사위로, 아들처럼, 그리고 아버지처럼 따스했던 제 장인 어른 <장 대子 봉子> 아버님.

지난 27년의 아름다운 그 인연을 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7남매 장남으로 홀어머니 모시고 일평생 농군으로 살아오신 아버님. 1934년에 태어나 2018년 2월 6일 오전 4시 36분에 유명을 달리하신 내 ‘또 다른’ 아버님. 부족한 사위지만 아버님이 생전 남긴 그 말씀처럼 결코 지지 않고 끝까지 싸워 반드시 불의한 세력을 이기겠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염원하신 반듯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이 약속을 다시금 이 막내 사위가 하겠습니다.

나의 또 다른 아버지, 장인어른이 남기신 유산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고 얼마 후였습니다. 아내가 할 말이 있다며 전하는 말이 놀라웠습니다. 장인어른은 그야말로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남기신 재산이라곤 약간의 땅과 천만 원 안짝의 저축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5남매 자식들은 아버님이 남긴 유산을 전부 어머니에게 상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은 생각이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떠나셨는데 자식들에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비록 적은 돈이지만 다섯 자식들에게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50만원씩 주시겠다며 억지로 돈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 돈을 어찌해야 할지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유산이라고 보면 한없이 적은 돈일 수 있겠지만 저는 장인어른이 남겨주신 그 귀한 돈을 가치 있게 쓰고 싶었습니다. 그 돈으로 떡이나 사 먹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생각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군 사상 유가족협의회 현판.

지난 4월 24일, 그날 서울 을지로에서는 가슴 아픈 어머니, 아버지들이 귀한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바로 군복을 입고 복무하던 아들을 잃은 부모님들이 만든 단체, ‘군 사상 유가족협의회’ 사무실 개소식이었습니다. 연극 <이등병의 엄마> 공연을 통해 세상을 울렸던 바로 그 엄마들이 회원으로 함께하고 있는 단체이기도 합니다. 그 분들이 ‘비록 우리는 안타깝게 자식을 잃었지만 다른 누군가는 우리처럼 가슴 아픈 일 당하지 말라’는 캠페인을 하는 단체입니다.

그런 단체가 개소식을 하던 날, 정말이지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한 분들이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셨습니다. 개소식에는 송영무 국방장관의 축하 화분과 함께 서주석 국방차관이 오셔서 위로와 격려를 전해 주셨습니다. 또한 여야 국회의원을 대표하여 국회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이철희 의원과 정의당 국방위 간사인 김종대 의원이 와 주셨고 국가인권위원회 조영선 사무총장 역시 자리를 해 주셨습니다.

   
▲ 국회 국방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과 정의당 김종대 의원.

전국 각양각지에서 많은 유가족이 함께 하여 군복을 입고 죽어간 이들의 순직 처리와 당연한 명예회복을 다짐하는 그 자리에서 저 역시 이 분들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습니다. 장인어른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산을 이 분들에게 전해 주면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아내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이후 <군 사상 유가족협의회> 김순복 회장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냐 물으니 텔레비전 한 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순복 회장님에게 “이 텔레비전은 제 장인어른이 군의문사 피해 유족 부모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전하며 그간의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텔레비전 한 귀퉁이에 ‘기증 장대봉 님’이라는 작은 문구 하나만 적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장인 어른의 따스한 마음은 군 유족 단체 사무실에서 영원히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생전 장인어른께서 실천하고 싶었던 마음을 이렇게라도 남길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부디 더 많은 분들이 군의문사 피해 유족 부모님 단체인 <군 사상 유가족협의회>에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담아 작은 후원을 함께 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고이 가소서.

 

고상만 국방‧인권전문기자

   

 

☞ 군 사상 유가족협의회

후원 계좌 / 농협 351-1005-1201-33

주소 / 서울 중구 을지로6가 31 301호

 

 

고상만 국방‧인권전문기자 rights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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