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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최루탄 쏘지마’ 외치고 이뤄냈는데 지금 백남기 어르신은..”

기사승인 2016.06.10  14: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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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64] 이경란 이한열 박물관장

   
▲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 지점에 새겨진 동판.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 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go발뉴스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29주년을 맞이했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던 중 사망한 박종철 열사 사건으로 국민은 분노에 가득 찼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호헌 조치를 발표한다. 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직선제 민주화 운동은 활활 타올랐지만, 정권은 강경 진압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당시 연세대에 다니던 이한열 군이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고 6·10항쟁이 일어나 결국 정권은 6·29선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한열 군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7월5일 사망했다. 6월항쟁 29주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궁금해서 지난 7일 서울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에서 이경란 관장을 만났다.

이 관장은 “30년은 한 세대가 지난 시간인데 당시 우리가 생각하고 외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나 더불어 사는 삶은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6월 항쟁 29년을 맞이하는 소회를 밝혔다. 

이 관장은 이어 “책에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분으로 나오지만 늘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라거나 ‘우리 사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농민인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은 이한열 열사를 떠올렸다. 이에 이 관장은 “1987년 보다 못하다고 느꼈다”면서 “그때는 적어도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다른 많은 분이 같이 거리로 나와서 ‘최루탄 쏘지 마’를 외쳤고 학생들이 요구했던 것을 이뤄냈고 사과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른이 200일 넘게 누워 계시는데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물대포 쏘지 말라고 하는 이는 적었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6월 항쟁의 현재적 의미를 이 관장은 “당시 요구는 직선제 개헌이었지만 단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루는데 1987년엔 직선제가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직선제 개헌 요구나 현재의 비정규직 철폐요구의 본질은 같다”면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옆에 있는 친구에게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 이경란 이한열 기념관장 ⓒ 이영광 기자

다음은 이 관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29주기, 한 세대 지나도 ‘더불어 사는 삶’ 여전히 멀어”

- 9일이면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신 지 29년이 되는 날입니다. 해마다 맞이하지만, 올해는 김 숨 작가가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소설로 써서 특별하게 다가올 듯합니다.

“30년을 한 세대라잖아요. 그래서 역사 속의 일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역사 속의 일로만 생각하기에는 안타까워요.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하고 외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나 더불어 사는 삶은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 이한열 열사 사망에 대한 진실 규명은 이뤄졌나요?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시고 경찰 측에서 ‘압수할 물건 : 이한열의 시체 1구’란 내용의 압수수색 검증 영장이라는 걸 가져왔어요. 아마 당시 경찰 측에서 이한열 열사 사망이 최루탄에 의한 것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시신을 탈취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열사가 쓰러지신 6월 9부터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치러진 7월 9일까지 한 달 내내 열사의 병상을 지켰어요. 경찰이 왔을 때 싸워서 경찰로부터 이한열 열사의 시신을 지켰어요. 그래서 부검할 때 유족 대표, 교수 대표, 학생 대표가 들어갈 수 있었지요. 그랬기에 최루탄이 원인이라는 부검 결과를 얻어냈어요.”

- 그럼 책임자 처벌도 이뤄졌나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가 서대문 경찰서장, 전경 중대장, 최루탄을 쏜 전경을 살인죄로 고발했어요. 하지만 법원이 기각했는데 그 이유가 전경 1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원인은 밝혀졌으나 책임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죠.”

“1987년엔 군부독재 타도, 2016년엔 비정규직 철폐”

- 사실 1980년 이후 태어난 30대 이하 세대는 이한열 열사를 잘 모르는 데 설명 부탁 드립니다.

“여기 오시는 젊은이 중 5.16과 5.18을 구분 못 하는 분도 계세요. 민망해하시면 자기가 안 겪은 건 6.25나 삼국통일이 같다고 얘기하지요. 자기가 안 겪어서 역사 속 숫자로만 기억하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문제는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더불어서 같이 잘 살 수 있을지의 문제의식도 같아요. 87년을 살았던 젊은이들이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했다면, 2016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비정규직 철폐나 청년들의 노동력을 헐값으로 쓰려는 사회 구조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봐요.”

- 이한열 열사 어떤 분이었나요?

“책에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분으로 나올 거예요. 역사적으로 기록된 이한열 열사는 그렇지만, 그분의 개인적인 글이나 일기를 보면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라거나 ‘우리 사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고민하거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라는 다짐이 있어요. 또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라고 짐작할 수 있죠.”

-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1987년에 대통령은 전두환이라는 사람이여서 탑 슬로건은 ‘호헌철폐, 독재 타도’였어요. 호헌을 철폐한다는 것에서 호헌은 헌법을 지킨다는 거예요. 당시 헌법이 어떤 것이었냐면 1980년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게 아니라, 국민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고 그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 방식이었어요. 이 방식으로는 국민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될 수 없고 전두환을 비롯한 노태우, 박준병 등 광주 항쟁을 탄압한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된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시민단체와 학생들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게 헌법을 바꾸자’고 했지만, 전두환은 헌법을 고칠 수 없다고 했던 게 4월 13일에 했던 호헌선언이에요. 저희는 호헌을 깨뜨리면 군부를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간선제 헌법으로 권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군부와 직선제로 헌법을 고쳐 민주를 쟁취하겠다는 시민과 학생들이 대립하고 있었어요.”

“이한열 운동화, 6월항쟁 잊어가는 우리 모습의 상징 같았다”

- 일부에서는 1987년 남영도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 열사가 서울대생이 아니었고 이한열 열사가 연세대생이 아니었더라도 주목했겠냐고 하기도 해요.

“조금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왜냐면 1980년대 많은 분이 돌아가셨거든요. 실종이나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했고요. 전태일 열사 이후 많은 노동자가 돌아가셨는데 언론에서 잘 다루지도 않았어요. 서울대생과 연세대생까지 죽였다고 언론에서 좀 더 다루긴 했겠지만, 6월 항쟁이라는 걸 놓고 보면 대학이 어디인지가 큰 영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87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가 배은심 여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go발뉴스

- 지난해 운동화를 복원하셨잖아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잖아요. 4.19 때 돌아가신 김주열 열사나 1987년에 돌아가신 이한열 열사를 우리 사회가 기억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재발방지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난해 11월 최루액이 담긴 물대포를 맞아 쓰러져 계시는 백남기 어르신의 문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 못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일 수 있어요.

기억이란 건 대개 기록을 통해 이어지는데, 때로는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딱 하나의 상징물이 더 많은 말을 해주기도 합니다. 부서진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는 마치 6월 항쟁을 점점 잊어가는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 같았어요. 그런데 지난해 운동화를 복원하면서 ‘우리가 87년에 무엇을 위해 노력했고 한열이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지’라고 1987년을 온전히 다시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매개물로서 그 역할을 해주고 있지요.”

   
▲ 고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이미지 제공=이한열기념사업회)

- 백남기 어르신을 언급하셨어요. 올 초에 이한열 열사 어머니와 함께 병문안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그 자리에 가셔서 어머님이 백도라지 씨에게 ‘앞으로 더 험한 일이 많을 것이네. 마음 단단히 먹소’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가 어르신이 쓰러지신 날부터 거기에 가셔야 한다고 생각하셨는데 옛일이 떠올라 힘들어서 가지 못 하겠다고 하셨어요. 2달 만에 가신 것이거든요.

다른 분들은 아마 위로하고 희망을 주셨을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이 직접 겪으셨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신 거죠. 그걸 보면서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되고, 당사자만이 아는 깊이의 고통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백남기 사건, 사과도 없고 물대포 쏘지말라 외치는 이도 적고 87년보다 못해”

- 백남기 어르신 사건이 이한열 열사 사건과 데자뷰인 것 같은데 보고 어떠셨어요?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공권력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그때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적어도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다른 많은 분이 같이 거리로 나와서 ‘최루탄 쏘지 마’를 외쳤어요. 학생들이 요구했던 것을 이뤄냈고 사과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 어른이 200일 넘게 누워 계시는데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물대포 쏘지 말라고 하는 이는 적지요. 그때보다 훨씬 많은 다른 압박, 예를 들어 ‘너 앞가림이나 해. 사회 문제에 관심 있다 보면 쫄쫄 굶게 될 거야’라는 압박이 훨씬 더 강하죠, 3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오히려 그때보다 못한 거죠.”

- 6월 항쟁이 일어나서 전두환 군부가 물러났어요. 물론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서 완전한 군부 종식으로 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6월 항쟁으로 발전해 왔어요.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주의가 퇴보했잖아요. 이것을 이 열사가 살아계셨다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1987년 6월 항쟁은 같은 군부인 노태우가 이어받아서 완벽한 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절차적으로 최소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절차적인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있죠.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이후에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87년보다도 더 못한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이한열 열사가 살아계신다면 당시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자기 일기장에 써 놓았듯이, 2016년에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럼이 없는 게 무엇일지 그것에 합당한 행동을 어느 곳에 계시든지 실천하셨을 거로 생각해요.”

- 6월 항쟁은 29년이 지났지만, 현재에서 갖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외친 건 직선제 쟁취예요. 그런데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기 위해 한열이가 목숨을 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직선제 뒤에 있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루는데 1987년엔 직선제가 중요했지요.

오늘날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면에서 보면, 직선제이든 비정규직 철폐든 본질에서는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서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고 이한열 열사 영정사진과 함께 한열 동산으로 행진 하고 있다. ⓒ go발뉴스

- 그럼 우리가 6월 항쟁을 기억하는 것에 끝나지 말고 행동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시는 권력 자체가 부당했고 폭압적인 사회라서 다같이 뭉쳐서 행동하는 것이 필요했어요. 오늘날에도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그런 면이 필요하겠지만,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옆에 있는 친구에게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GO발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GO발뉴스>가 ‘이한열 스튜디오’라는 명칭을 사용하세요. 그건 <GO발뉴스>가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올바로 보도하겠다는 의지로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놓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이한열이 목숨을 걸고 실천해야 할 것을 실천했듯이 <GO발뉴스>도 지금처럼 실천해야 할 것을 굴함 없이 실천해 가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서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더불어민주당 우상호(왼쪽부터) 원내대표,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참석자들이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서 정태원 전 로이터 사진기자가 자신이 취재한 사진이 그려진 포스터 앞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이영광 기자 kwang38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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