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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사적 개인화’ 넘어 ‘사회적 변혁운동’으로 가야

기사승인 2018.02.24  11: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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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폭력에 대한 인지교육 제도화로 ‘미투’, 교육되고 대중화 돼야”

   
▲ <사진=페이스북 이미지 캡처>

최근 한국뉴스들에서는 연일 다양한 직업군에서 성추행/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계, 문화계, 출판계, 정치계, 교육계, 종교계, 군대 등 다양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성희롱/성추행의 당사자들이 거의 한결같이 하는 자신의 변은 ‘의도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성추행의 행위들을 인정하는 이들도, 우선적인 변명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차별, 추행, 희롱, 폭력 등은 가해자 본인의 ‘의도성’과는 전혀 상관없이도 일어나며 성립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는 피해자 자신들도 그러한 행위들이 자신에게 가해졌을 때, 그러한 행위가 ‘차별, 추행, 희롱, 폭력’ 등의 범주에 들어가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이러한 범주화는 한 사회의 “인권에 대한 예민성”의 척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동일한 행위가 어떤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심각한 인권유린과 폭력, 차별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세부화되고 확장되는 것이어서 지속적인 교육이 요청된다.

예를 들어서 대학교수의 은퇴 정년이 없는 미국 대학교에서는 대학총장과 같이 권력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특정 교수에게 ‘언제 은퇴할 것인가’라고 하면, 그 질문 자체가 ‘나이차별주의 (ageism)’에 들어간다. 자신이 교수-학자로서의 능력이 있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이가 80이든 90이든 교수로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신직 (테뉴어:tecure) 교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는데, 종신직 교수가 되었다고 해도 매년 자신의 교수-학자로서의 업적을 제출하고 보이는/보이지 않는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소위 ‘고문관’ 교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은퇴정년이 없다고 하면 혹시 능력없는 교수들이 무책임하게 학교에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스러운 경우들을 내 주변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다. 철저한 책임성이 요구되는 교수직을 육체적/정신적 한계를 가지게 되면서까지 무작정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다른 사람의 ‘나이’에 대하여 개인적 호기심을 갖고, 그 호기심을 표출하는 것이 아무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화에서, ‘나이차별주의’의 개념에 대하여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나이차별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오래지 않다. 또한 ‘외모차별주의(lookism)’라는 ‘차별’의 범주화도 과거에는 인식되지 않았던 개념이다.

이렇듯 다양한 종류의 차별, 추행, 희롱, 폭력 등에 대한 사회적 범주는 간결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대/사회적 정황에 따라서 바뀌어지고, 재구성되고, 확장되면서 지속적인 ‘교육’을 받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이러한 지속 교육의 하나로서, 내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교수와 직원들 모두가 매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차별방지를 위한 온라인 교육이 있다. 그 교육은 성별, 성적 성향, 인종, 계층, 육체적 생김새, 나이, 임신 여부등과 연계된 ‘모든’ 종류의 희롱이나 차별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 교육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 정부에서 모든 대학들에 요구하는 필수적인 것으로서 VAWA (여성에 대한 폭력방지법: Violence Against Women Act) 과 SaVE (성적 폭력 제거법: Sexual Violence Elimination Act)이다. SaVE는 직원과 교수 모두가 받아야 하며, 교수들은 거기에 VAWA를 더 받아야 해서, 두 가지 교육을 받은 후 시험을 봐서 합격점에 이르러야 ‘교육 이수증’을 받는다.

교수와 직원들이 모두 반드시 받아야 하는 SaVE는 109 개의 슬라이드, 그리고 교수들만 따로 받아야 하는 VAWA는 90개의 슬라이드로 되어 있는데, 각 슬라이드는 다양한 구체적인 사례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이 두 가지 교육훈련을 받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600 여명이 되는 교수와 1,400 여명의 직원 등 모두 2,000여명이 넘는 전임직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양한 종류의 ‘희롱’, ‘폭력’ 또는 ‘차별’ 이 어떻게 생겨나고 있으며 어떻게 그러한 범주로 규정되는가에 대한 세심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매년 받는 교육이므로 그 세부적 내용은 매년 달라서, 교육을 받을 때 마다 새롭게 배우게 된다. 또한 전체 학생이 1만 여명 가량있는 이 대학교는 각 단과 대학마다, 그리고 대학 전체에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특별 위원회 (Harassment Committee)가 가동되고 있다.

내가 작년에 이 온라인 교육을 받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두 가지를 한번에 다 하려던 계획을 포기했었다. 하나를 먼저 하고서 ‘시험’까지 보고 나니 그 다음 하나를 다시 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나는 오전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후 늦게 마쳤다. 아마 하나 하는 데에 두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마지막 시험을 보면서 나는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개의 문제에서 맞는 답을 내지 못했는데, 대부분의 경우가 피해자로부터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는 그러한 사건을 목격했을 때 교수로서 어떠한 후속조치들을 취해야 하는가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안들이었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다양한 케이스들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차별, 추행, 희롱, 폭력 등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그러한 일이 강의실에서, 캠퍼스에서 생겼을 때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하는지, 어떠한 법적 제재를 받고 있는지를 알아맞혀야 해서, 모든 문제에 정답을 내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성별, 인종, 계층, 육체적 생김새, 성적 성향, 나이, 장애 등에 근거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차별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연구하고 가르쳐 왔는데도 그 모든 예민한 사항들에 ‘정답’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의 필요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다.

   
▲ 이숙진 여성가족부 차관이 지난 21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제2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아동·청소년의 성보호, 청소년 기본법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 등을 상정했다. <사진제공=뉴시스>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다양한 차별적 언어들과 행동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차별, 추행, 희롱, 폭력 등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도성’과 상관없이 다양한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나’에 의해서 또는 ‘타자’들에 의하여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인은 그러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든가 또는 ‘몰랐다’고 해서 그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추행, 희롱, 폭력, 차별 등에 대한 이해는 한번의 교육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 따라서 각기 다른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지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선 사회의 차별과 평등에 대한 인지도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무엇을 그러한 행위로 규정하는가에 대한 인식의 정도에 따라서,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이해는 지속적으로 예민화되고,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포함한 교육기관, 기업, 종교기관 등 다양한 공공기관들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지속교육’을 필수적으로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지금의 “미 투 운동”은 장기적으로는 근원적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하는 ‘사회적 변혁운동’으로 자리잡기 힘들다고 나는 본다.

‘개인화(individualized)된 미 투 운동’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고발’에 그치게 되고 만다. 그러나 그 개인들로 촉발된 ‘미 투 운동’이 ‘사회적 변혁운동’으로 이어질 때, 한국사회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변혁역사를 보면, 이러한 저항적 소리를 내는 개인들의 소리가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만 함몰되지 않고 그 개인들을 넘어서서 사회의 변혁운동으로 이어졌을 때, 비로소 중요한 역사적 변혁운동으로 자리잡게 되곤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 투 운동’과 같은 사건이 한국의 사회적 변혁운동으로서 자리잡게 되기 위해, 차별과 폭력에 대한 인지교육의 제도화를 통해서 교육되고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요청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차별과 폭력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확산과 그러한 행위들을 엄격하게 제재하는 제도적 장치 등이 뿌리내리게 되도록 연결되어야 한다. 그 때 ‘미투 운동’이 진정한 변혁운동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미국 텍사스 크리스쳔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것으로, 본인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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