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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종대왕 조선의 세법을 세우다(下)세종대왕의 민주적인 세법 개혁

1215년 영국 존 왕의 실정에 격분한 귀족과 성직자들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왕에게 강요하여 대헌장(Magna Carta)을 체결하였다. 이 대헌장의 조문에 “과세는 과세당하는 자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왕권으로부터 귀족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왕에게 요구한 것이다. 이 조문이 근대에 이르러 조세법률주의의 효시가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1418년에 왕에 오른 세종대왕은 스스로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세법을 만들기 위하여 25년 이상 조정에서 토론하고, 여론을 조사하고, 시험적으로 실시를 하여 세법을 개혁하였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세종대왕 만큼 민주적으로 세법을 입법하고 조세정책을 시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세종대왕은 전세(田稅)의 공법을 입법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신료들과 무려 17년 동안 대화와 타협을 하였으며, 양반관리 뿐만 아니라 여염집 백성들까지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수년 동안 충청도와 전라도 및 경상도에 시험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일반 백성들 3분의 2가 찬성하면 공법을 시행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왕권시대의 세종대왕이 현대에서도 실시하기 어려운 이러한 민주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공법을 만들고자 한 것은 오르지 백성을 위해서였다. 백성이 넉넉해지는 세법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 때문에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조세와 관련된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와 학생들을 비롯하여 세무사와 같은 조세전문가, 조세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 등 대부분이 이러한 세종대왕의 세법 개혁의 역사성과 정책이 주는 교훈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세종대왕이 왜 국가정치에서 조세를 가장 으뜸으로 중요시 하였을까? 그리고 왜 그토록 민주적인 방법으로 세법인 ‘공법’을 만들려고 하였을까? 그것은 조세가 백성들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세법을 ‘대법(大法)’이라고 하며 조세의 법치를 내세우면서 후세에 남길만한 세법을 만들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왕실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들의 재량권을 배제하고 조세 부패를 척결하여 공평과세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먼저 세종대왕은 재위 9년에 과거시험인 중시의 책문에 「공법으로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방책」에 대한 문제를 내어 신진관리들에게 물었다. 세종대왕이 기존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공법을 시행하기 위한 첫 번째 공식적인 행보였다. 이때 세종대왕은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내어, 신참 관리들의 생각을 통해 백성을 위한 세법을 만들고자 했다. 이 과거시험에서 훗날 세종대왕의 최측근으로 공법 시행을 위해 선봉장이 된 정인지가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재위 10년에 좌의정 황희와 조정에서 공법을 논의하면서 “만약 공법을 한 번 시행하게 되면 풍년에는 많이 취하는 걱정은 비록 면할 수 있겠지마는, 흉년에는 반드시 근심과 원망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옳겠는가?”라고 물었다. 세종대왕은 이미 개혁하고자 한 공법에 대해서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다음해(재위 11년)에 “몇 년 전에 공법의 시행을 논의하고도 지금까지 아직 정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의 인구가 점점 번식하고, 토지는 날로 줄어들어 의식이 넉넉하니 못하니, 가위 슬픈 일이다.”라고 했다. 세법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개혁에 진척이 없음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이윽고 1년 후인 재위 12년에 세종대왕은 호조에서 올린 ‘1결 10말 공법’에 대해 정부·육조를 비롯한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각 품관, 각 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에서부터 여염의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찬반을 묻게 하였다. 이전의 ‘답험손실법’과는 완전히 다른 논밭 1결에 고정된 10말씩 징수하는 공법의 시행에 대한 여론을 조사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왜 양반 관리뿐만이 아닌 일반 서민에게까지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도록 했을까? 조세부담의 주체인 농민들의 뜻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양반 관료의 계급사회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농민들까지 세법의 개정에 대한 찬반을 묻게 한 것은, 민본(民本)의 사고를 넘어서 민주적인 사고였다고 본다. 진정으로 백성의 뜻에 따라 조세정책을 결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것이다. 세법은 조정에서 만들되 그 법의 시행 여부는 백성의 뜻에 따르고자 한 세종대왕의 정치적 결단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 황희 등의 반대로 세종 18년까지 세법 개혁은 중지되고 말았다. 그 후 재위 19년에 세종대왕은 “지난해에 비록 공법을 세웠으나 시행하지 못했다. 내 항상 공법을 행하고자 하여 몇 해 동안의 중간 수량을 참작해서 답험하는 폐단을 없애버리고, 여러 대소 신료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물어보았더니, 공법을 원하지 않는 자가 적고,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으니,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가히 알았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분분해서 잠정적으로 그대로 두고 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황희와 공법을 논의한 이후 10년 동안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여 공법을 실시하지 못한 아쉬움을 말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군주이지만 세법 개혁을 강행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재위 20년에 세종대왕은 “나는 경상·전라 양도의 인민들 가운데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3분의 2가 되면 우선 이를 양도에 시행하려니와, 3분의 2에 미달한다면 기어이 강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하여 어떤 폐단이 생기게 되면 즉시 이를 개정하곤 하면, 거의 그 폐단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반드시 이 법을 시행하려는 것도 아니니, 경들은 이 법의 이해(利害)를 잘 알아서 속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경상·전라 양도의 백성들 가운데 3분의 2가 찬성할 경우 공법을 시험하겠다고 하였다. 다시 한 번 민주적으로 공법을 시행하려는 세종대왕의 의지를 보여 준 대목이다. 세종대왕이 공법을 논의하면서 늘 물러선 이유는 한결같이 폐단 없는 세법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공법이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재위 21년에 “내가 공법을 행하고자 한 것이 이제 20여 년이고, 대신들과 모의한 것도 이미 6년이었다. 공법을 이제 정했으나 오히려 백성에게 불편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으로, 이제 전라·경상 두 도에만 행하여 그 편리한 여부를 시험하게 했다.”고 하였다. 세법 개혁에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공법의 시험결과 거두어들인 세수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세종대왕은 최종 공법을 완성하기 1년 전이 재위 25년에, “지금의 조세를 보면 예전보다 배나 되니 백성들의 원망을 역시 알 수 있다. 내가 공법으로 많이 거두어서 나라를 부하게 하려 함이 아니었다. 다만 답험손실법의 폐해를 염려하여 이 법을 세운 것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중하게 거둔다는 비평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하였다. 배나 증가된 세액에 따른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공법을 다시 논하게 의논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분6등법·연분9등법’의 공법이 세종 26년에 완성되었다.
우리는 위대한 세종대왕의 이러한 조세 정치를 통하여 ‘서두르지 않는 국민을 위한 세법의 입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한다. 경제와 정치라는 명목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세법이 너무 난도질당하기 때문이다.

※ 오기수 약력
- 전) 김포대학교 교수
- 전) 한국조세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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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신문 제761호(201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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