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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7년, 천년 후...

글자나 숫자의 오타, 문자를 주고받을 때 가끔 나타나는 실수다. 얼른 이해를 못하거나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뜻이려니 미루어 짐작해서 문제없이 넘어가는 게 일반적인데, 때로는 웃음을 주거나 뜻밖의 상념에 잠기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지자체에서 발급한 부동산거래계약 신고필증을 검토하게 되었다. 내용을 훑어보다 깜짝 놀랐다. 계약체결일이 2017년 ○월 ○일인데 잔금 지급일은 3017년 ○월 ○일로 되어 있지 않은가. 3017년! 3017년이면 천년 뒤가 아닌가. 2017년의 명백한 오기이리라.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천년 뒤의 시공간이 갑자기 내 앞으로 쑤욱 다가왔다. 그것은 2023년의 사무실에 있는 나를 불쑥 천년 뒤로 시간여행을 하게 하였다. 어떤 세상일까. 어떻게 변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그때의 인류에게 현재의 우리는 또 얼마나 옛 사람일까.

어쩌다 가끔 나는 발 딛고 있는 이곳의 옛 모습은 어땠을까를 상상할 때가 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야와 삼한시대의 유물들이 있는 복천동 박물관과, 5세기에서 7세기경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연산동 고분군이 있다. 유물이나 고분을 통해 먼 옛날의 생활을 그려 봄은 그 자체로 호기심을 어느 정도 채우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도심 한복판이나 농촌의 어느 마을에 있을 때, 상상은 십년 전, 백년 전, 그러다 점점 거슬러 천년도 훌쩍 뛰어 넘을 때가 있다. 인구는 줄어들어 만 명, 백 명, 그러다 아예 없는 원시의 자연에까지 이른다. 그때의 말씨로 지금과 의사소통은 될까. 꼭 천년 전 까지 아니라도 좋다. 불과 몇 십년 전이라도 당시를 안다는 것은 놀라움과 경이를 주기도 한다. 그런 상상을 즐긴다.

서울 강남은 오륙십 년 전만 하더라도 채소와 화훼 재배를 주로 하던 농촌이었다. 압구정과 돛배가 한갓진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圖)에서, 아파트로 빽빽한 오늘날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매년 국제영화제가 개최되는 영화의 전당과 세계 최대라는 백화점이 수영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부산의 센텀시티도 그렇다. 1900년대 초의 누런 사진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수영을 하는 강변이었다. 몇 채의 집들이 드문드문한 어촌에 100층 건물이 들어서고 밤이면 불야성으로 변하는 지금의 해운대 역시 그려볼 수 있었을까.

더듬어가다 보니 현재의 이런 모습들은 많이 양보해도 불과 백여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들 같다. 백년 전만 하더라도 농경사회라는 기본 틀에서 오백년, 천년 전과 큰 변함이 없었다. 의식도 그러지 않을까. 천하의 근본이라는 농사가 경제의 주류였고 인권이나 자본주의 개념 등이 뿌리내린 역사는 길지 않다.

3017년이 가져다 준 천년 후의 미래는 어떠할까. 너무 막연하다.

밭이 빌딩숲이 되고, 해 지면 불야성이 되는 그런 변화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테다. 정신문명 역시 현재의 관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사고로 바뀔 줄도 모른다.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지금은 세계 인구의 ‘대팽창 시대’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인구 감소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한다. 천년 뒤는 몇 억명 밖에 되지 않을 ‘대감소의 시대’가 되지는 않을 런지.

메타버스(metaverse)라는 용어를 주변에서 듣는다. 현실을 초월한, 모호한, 즉 3차원의 가상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사물인터넷이나 증강현실 등의 개념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데 더 진보된 기술이 출현하는 셈이다. 과학은 사람의 삶을 얼마나 더 바꾸려는가, 문명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 일런가.

폰에 저장한 사진을 본다. 명왕성 가까이서 보이저1호가 촬영한 지구 모습이다. 깜깜하고도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먼지 같은 점 하나. 눈부신 문명의 뒤안길에 드리운 대립과 갈등, 기후 변화나 핵전쟁 위협 등의 재앙 앞에 놓여 있는 지구. 천년 후의 인류는 그 수렁을 뛰어넘어 광활한 저 우주에서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살아갈까.

천년 전으로 갈수록 산과 들판만 그려내는 빈약한 상상력은, 천년 후의 모습 역시 우주식민지나 복제인간 정도의 수준에서 그저 맴돌 뿐이다.

600만 년쯤 되는 인류 역사에서 문명 생활은 불과 사 오천년 전에 시작했다. 일년으로 보면 문명 혜택을 입기 시작한 게 12월 31일하고도 한참 늦은 오후쯤 된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이룬 너무도 가공스런 문명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천년은 고사하고 백년 뒤의 모습조차 감이 잡히질 않는다.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더니 생각은 천년 뒤를 상상하며 우주로 확장되었다. 그러다 작디작은 한 점 지구를 보며 공상은 어느새 현재로 돌아왔다. 막막한 영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천년 뒤가 아닌, 정작 지금의 나는 무엇이고 어떠한가.

광대한 우주에선 천년 시간도 한 순간이겠다. 천년 전의 왕과 필부가 내겐 그저 옛 사람일 뿐이니, 천년 후의 나 역시도 그들에겐 그러 할지다. 나의 존재와 하는 일이 문득 티끌 같았다. 그래도 티끌 같은 존재로 해서 천년 전과 오늘과 천년 후가 이어지니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을 테다.

중요한 건 티끌로 사라지고 없을 천년 후가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였다. 숨 쉬는 한 살아내야 하니까. 평소 생각으로 도돌이한다. 성공, 욕망, 사랑에 휘둘리는가. 소중한 가치이긴 하나 집착은 말자며, 덧없으나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자며 느닷없이 마주한 3017년이 다시 일러주는 거 같다.

 

세무사신문 제856호(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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