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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마녀사냥’ 했던 언론도 사과해야 한다

기사승인 2018.11.22  16: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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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노태우 정권 공안정국 조성에 가담한 일등공신은 언론이었다

“박(홍) 총장의 발언은 더욱 의미있는 것이다. 그는 자살한 김(기설)씨의 배후세력을 ‘전염병균 같은 이들’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그늘에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물귀신 공법으로 물 마시듯 폭력을 점염시키고 있다’고 규탄했다. (중략)

자살과 시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또 바로 그같은 인간가치 파괴의 행태는 국민의 동정과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정말로 필요한 우리 사회의 건전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마저 모두 왜곡시키고 퇴색시키지 않을까 박 총장과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5월10일 조선일보 사설 <박홍 총장의 경고> 가운데 일부입니다. 당시 박홍 서강대 총장은 김기설씨 분신자살과 관련해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배후에 분명히 죽음을 조종하는 선동세력이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습니다. 

   
▲ 박홍 전 서강대학교 총장 <자료사진=뉴시스>

‘강기훈 마녀사냥’에 나섰던 언론들 … 이제라도 1면에 사과문을 내야 한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우리는 박 총장이 어떤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서도 “하지만 그의 말대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자살 소동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의문점이 개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낀다”며 박홍 총장의 발언에 힘을 실었습니다. 

대학 총장이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엄청난 발언’을 했다면 그 행위 자체를 꾸짖는 게 언론의 온당한 태도인데 조선일보는 “(박홍 총장이)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서 그를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호평했습니다. 

언급한 조선일보 사설은 당시 상당수 언론이 자행했던 ‘마녀사냥’의 일부일 뿐입니다. 박홍 서강대 총장은 자신이 주장한 배후 세력의 실체를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대다수 언론은 박 총장의 발언을 여과없이 받아쓰기 바빴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 조성’에 당시 언론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강기훈씨에 대한 마녀사냥 보도가 너무 많아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프레임전쟁>(미디어오늘 지음, 동녘)에서 정철운 미디어오늘 기자가 당시 언론보도 문제점을 정리했는데 해당 부분을 일부 인용합니다. 

“제도언론은 검찰발 기사 쓰기에 급급했다. 조선일보는 5월9일자 <분신현장 2~3명 있었다 : 목격교수 진술, 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기사를 실었다 (중략) 대다수 언론은 검찰 뜻대로 움직였다. 박홍 발언에 무게감을 얹고 사건에 미스터리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예로 5월9일자 중앙일보는 ‘분신 직후 다른 사람이 즉시 유서를 공개하거나 현장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본관 5층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전날 저녁부터 잠겨있었음에도 외부인인 김씨가 올라갈 수 있었다’며 외부인의 ‘조력’ 가능성을 강조했고, 박홍 총장의 발언에 대해선 ‘검찰은 사회민주화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 박 총장이 자칫 재야운동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을 한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략) 

국민일보는 5월18일자 지면에서 ‘검찰은 김씨가 남긴 유서 필적이 자필과 다른 사실을 밝혀내 유서를 대신 써준 사람을 찾아내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일보는 5월19일자 지면에서 ‘검찰이 자살방조혐의의 유력한 용의자로 전민련간부를 지목하고 신병확보에 나선 것은 잇따른 분신사건에 배후세력이 있다는 가설을 입증해주는 것이어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이 소설 같은 상황에 깊이 몰입했다. 전민련측 반박은 검찰 주장과 비교할 수 없이 작게 처리됐다.”

   
▲ '유서대필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 상고심을 거쳐 24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가 서울중앙지법에 지난 2016년 11월10일 출석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정권과 검찰 뜻대로 ‘받아쓰기’ 바빴던 당시 주류 언론들

당시 정권과 검찰 뜻대로 ‘받아쓰기’ 바빴던 주류 언론들은 2018년 현재 ‘유서대필 사건’이 노태우 정권 지시에 따라 조작됐다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다시 그대로 받아쓰고 있습니다. 

재심을 통해 사건 발생 24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노태우 정권 지시에 따라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강기훈 씨에 대한 검찰총장 사과 등을 권고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과거 보도’에 대한 사과도 없고, 마녀사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부분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도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강기훈 씨를 범죄자로 모는데 앞장섰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이 아무렇지 않은 듯 과거사위 조사결과를 보도하는 것을 보며 분노를 느낀 이유입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유서대필은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고, 2015년 5월 대법원도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했다면 그리고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조사결과까지 나온 상황이라면, 많이 늦었지만 당시 검찰과 정권 편에서 강기훈 씨를 범죄자로 몰았던 언론들도 이제는 사과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1면 전면을 할애해 당시 자신들의 보도가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독자와 강기훈 씨에게 사과를 해도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에서 ‘그런 언론’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경우 2015년 대법원이 재심에서 강기훈 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자 사설에서 ‘궤변’에 가까운 주장을 내놓습니다. 한번 보시죠.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재판부마다 다를 수는 있다. 궁극적 진실은 강(기훈)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 재심 제도라는 것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기 위해 사회가 합의한 절차인 만큼 강씨에게 내려진 재심 대법원의 무죄판결은 존중되어야 한다. 강씨는 지난 24년간 줄곧 무죄를 호소하며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간암을 앓고 있는 강씨는 이날 대법원 재판에 나오지 못했다. 무죄판결이 난 이상 국가는 강씨에게 합당한 보상(補償)과 함께 명예 회복 조치를 해줘야 한다.

강씨에게 유죄를 내린 법관들도 법에 따라 양심껏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판하는 것이 사법 제도의 기본 정신이다. 모든 법관은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무겁게 봐야 한다.” (2015년 5월15일 조선일보 사설 <‘無罪 확정된 '유서 대필'과 강기훈씨의 24년 고통>) 

   
▲ 2015년 5월15일자 조선일보 사설 <이미지 출처=조선일보 PDF>

“궁극적 진실은 강기훈 씨 본인이 아는 것”이라고 했던 조선일보

무고한 사람을 유서대필범으로 조작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은 당시 정권과 검찰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강기훈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이었습니다. 사실상의 공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당시 수사검사였던 강신욱 전 대법관(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 신상규 전 검사장(당시 주임검사), 유서 필적 감정을 맡은 김형영 전 국과수 문서감정실장과 다수 언론들.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우게 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서글픈 건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조작에 간여한 누구도 아직 강기훈 씨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한민국 언론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민동기 미디어전문기자 

민동기 미디어전문기자 media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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