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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계엄령 문건’, 80년 보안사 내란음모 사건과 흡사

기사승인 2018.07.28  10: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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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무사, ‘전두환 보안사’ DNA 여전히 지니고 있어.. 대단히 충격적”

국군 기무사령부가 2017년 3월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에 따르면 계엄 이후 언론 등에 대해 세밀한 통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기무사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가 1979-1980년 자행한 내란음모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23일 공개된 세부 문건에 따르면 언론 통제의 경우 계엄선포와 동시에 언론 사전검열, 언론사별 계엄사 요원 파견계획 등이 작성돼 있었고 계엄사 보도 검열단 9개 반이 신문·방송·통신 및 원고 간행물 견본을 제출받아 검열할 계획이었다<KBS 7월 23일 / 연합뉴스. 7월 20일>.

또 조선일보 매일경제 등 26개 언론, KBS CBS YTN 등 22개 방송, 연합뉴스 동아닷컴 등 8개 통신사 및 인터넷 언론사에 대해 통제요원을 편성해 보도를 통제하도록 했다. 인터넷 포털 및 SNS 차단 등 유언비어 유포 통제도 담겨 있으며 정부부처 조정통제방안, 각국 대사관에 파견된 무관단, 외신 등을 어떻게 설득할지도 나와 있다.

문건은 광화문과 여의도에 탱크를 투입하는 등 세부계획까지 담겨 있고 계엄 해제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무력화 방안을 제시하면서 미국 정부로부터 계엄 인정을 받도록 조처하는 등 치밀한 계획이 담겨 있어 내란음모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문건에는 1979년 10·26 사태 때와 1980년 계엄령 선포 때의 담화문과 함께 2017년 3월에 공포하려 했던 담화문이 나란히 실려 있는 등 기무사가 전두환 신군부의 핵심 세력이었던 보안사의 DNA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대단히 충격적이다. 기무사령관이 합참이나 국정원을 제끼고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을 맡아 내란을 주도한 것과 흡사하다.

기무사가 지난해 기획했던 언론통제는, 지난 1980년 광주학살 당시 강행된 전국언론인들의 검열제작거부에 대해 보안사가 자행한 언론인 강제 해직, 언론사 불법 통폐합이라는 범죄를 연상케 한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이 자행한 언론인 강제해직사건이 신군부의 불법행위라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및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등의 내란음모 사건 조사과정에서 그 사실관계가 일부분 밝혀졌고, 대법원이 이를 내란죄의 일부로 판단한 바 있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2007년 10월,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해 그 전모가 밝진 바 있다.

   
▲ 국방부가 23일 오후 논란이 일고있는 국군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을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했다. 뉴시스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에 포함된 언론통제의 심각성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1980년 광주항쟁기간 동안 전국 언론인들이 강행한 검열 및 제작거부 투쟁과 보안사의 악랄한 보복조치 등에 대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진상 규명 자료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보안사는 1979년 박정희 암살로 내려진 계엄에 따라 실시된 신문, 방송, 통신, 잡지에 대한 보도검열을 주도하면서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각종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보안사는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을 만든 뒤 ‘시청 검열단에서 10.26 이후 매일 실시하는 보도검열업무를 조종감독한다.’고 규정하고, 조종내용을 ①과대과소 관제(管制) 여부 검토, ②검열단과 언론기관 간의 견해 상 차이점 조정, ③검열기준시행 상태 점검, ④검열과정 상에서의 물의 배제, ⑤현지 조언을 통해 제반 문제점 해소책 강구 등으로 밝히고 있다(사건기록철 제2권 제200쪽, 2처, 「언론조종반 운영계획」, 1980. 3. 27).

보안사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비상계엄 시행지역이 제주도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국으로 확대, 실시됨에 따라 강력한 보도통제를 위하여 별도의 보도통제 지침을 마련하고 보도 관제를 강화했다. 이 보도통제 지침의 표지 상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결재를 하면서 ‘보도처 위반시 폐간’이라고 직접 기재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자료 10쪽). 전두환은 광주항쟁 기간 동안 언론인들의 검열 제작거부가 벌어지자 언론사 사장들을 불러 ‘검열제작 거부 투쟁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언론사를 폐간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일부 언론사 앞에 장갑차를 배치했다.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경부터 ‘정보처’를 신설하고 ‘정보처’ 내에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언론조종반’을 가동하였다. ‘K-공작’을 실시하여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들을 회유했다. 신군부는 ‘K-공작’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ㆍ분석했다.

‘언론조종반’ 외근요원들은 언론인과 언론기관의 동정을 파악하였고, 내근요원들은 파악된 사항을 정리하고, 언론의 논조를 분석하는 등 각종 문서를 기안하였다. 파악된 언론인들의 동정, 작성된 언론사 강제 통폐합 관련 시안들은 각각 언론인 강제 해직, 언론사 강제 통폐합 과정에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의 일환, 또는 연속선에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 분석했다. 신군부는 언론인 간담회를 개최하여 언론사주, 간부 등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신군부 측에 협조하도록 요구했다. 간담회에서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 및 평가를 수집 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역시 보고했다(.사건기록철 제8권 제1631쪽, 「간담회 보도성향 분석 및 언론계 반응」, 1980. 4. 30).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에 적시된 언론반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 계엄 하에서의 대언론정책연구
○ 각 매체에 대한 보도성향 및 언론분석
○ 언론검열 지침 자료 제공
○ 언론활성화공작
○ 국민홍보방안 및 대책검토
○ 기타 특명사항 수행

K-공작은 5.18 등 주요 사건 발생 언론조종반이 언론인들을 접촉하고, 보안사령관 전두환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신군부 주도하의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전두환의 이미지 개선과 사회안정 유도, ‘개혁세력’의 정당성과 정권획득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언론인 접촉 공작이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자료 37쪽).

   
▲ 10·26으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자 언론계에서는 평기자 중심으로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 실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봇물 쏟아지듯 일어났다. 사진은 1980년 5월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검열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모습. 한국일보 40년사 제공

한편 한국기자협회는 1980년 4월 합동통신 김태홍 기자를 회장으로 선출한 뒤 같은 달 8일 ‘헌법개정과 언론자유’ 강연회, 같은 달 25일 ‘언론조항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하고, 5월 초 언론기본법의 기자협회 시안을 마련하여 국회 개헌특별위원회와 정부의 개헌심사위원회에 제출하는 등 언론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적극 주장했다.

각사의 검열거부 및 자유언론수호 움직임에 맞추어 기자협회는 5월 16일 기자협회는 협회장 김태홍의 주관 아래 재경각사 분회장 및 운영위원 연석회의(기자총회)를 개최하고 5월 20일 0시를 기해 검열보도거부를 결의하여, 거의 모든 언론사의 일선기자들이 사실상 언론제작 거부에 동조하게 되었다(『80년 5월의 민주언론 -80년 언론인 해직백서』(한국기자협회, 해직언론인협의회 공저, 1997).

이에 대해 보안사는 언론인 강제 해직을 자행하기 위한 공작을 벌여 국보위 문공분과 위원회가 기본지침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보안사가 해직대상자를 선정하여 명단을 작성했다. 이어 문공부가 언론사의 자율결의 형식을 빌어서 이를 집행하면서 집행과정 중 언론사에서 해직대상자 외에 추가로 많은 인원을 포함시켰다.(사건기록철 제12권 제3036쪽, 이상재 진술조서(제2회), 서울지방검찰청, 1996. 1. 9).

당시 보안사는 검열제작 거부에 앞장선 언론인들을 국시부정, 반정부세력으로 분류해 영구취업 불허 조치를 취했다. 언론인 정화 조치」라는 1쪽짜리 요약보고 문서에는 ‘80년 7월 국보위의 언론인 정화 방침에 의거하여 신문협회 및 방송협회의 언론 자율정화 결의가 있었고, 1980년 8월 국보위에서 정화 대상자를 문공부에 통보, 정화 조치를 했다’고 기재하고 정화 등급 분류 기준을 A, B, C급으로 나누어 구분했다(사건기록철 제2권 제130쪽, 「언론인 정화조치」).

A급 : 국시 부정 행위자, 제작거부 주동자(극렬분자) 및 배후 조종자, 특정 정치인 추종 및 유착자
B급 : 제작 거부 주동 및 선동자(차장급 이상 포함), 부조리 행위자(억대 이상 치부자, 차장급 이상), 기타 파렴치 행위 및 범법자
C급 : 단순 제작 거부 동조자, 부조리 행위자, 기타 자체 정화자

보안사는 강제 해직된 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기 위하여 ‘총무처 비위관련 공직자 취업제한 기준에 준하여 형평을 유지하기 위한 취업제한’이라는 명분으로 「정화언론인 취업허용 제한기준」을 만들었다. 해직언론인은 공무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총무처 비위관계 공직자 취업제한 규정을 적용하였고, 언론사 및 관계단체, 공무원, 국영업체, 정부투자 및 출자법인과 단체에 취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사기업의 홍보 및 광고 담당 요원까지를 해직언론인의 취업을 제한하였다. 위 문서에 의한 취업 제한기간 및 ‘국시부정 및 반정부’를 이유로 한 영구 취업불허자는 다음과 같다(사건기록철 제2권 제249쪽, 2처, 「정화언론인 취업허용 제한기준」).

   

이후 보안사는 1980년 9월 해직언론인 711명 중 국시부정 및 극렬 반정부자 28명을 제외한 인원에 대하여 1차 순화시킨 후, 타업종 취업을 허용할 수 있도록 노태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결재를 받았고, 같은 달 30일 13명을 영구취업제한하고 나머지 인원은 취업을 허용할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은 분류기준으로 다시 결재를 받았다(사건기록철 제2권 제268쪽, 2처,「정화언론인 타업종 취업허용건의」, 1980. 9. 15./사건기록철 제2권 제155쪽, 「정화언론인 취업허용건의」, 1980. 9. 30.). 이 인원에 대한 명단이 첨부되어 있지 않아, 위 문서에 의한 영구취업 제한자가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보안사는 해직언론인 취업허용과 관련해 취업을 허용할 경우 비위공직자와 동일조건으로 취업요건을 완화함으로써 신분상 공무원과 준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형평성을 유지하며, 반성자에게 취업기회를 부여하여 불평불만자의 집단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허용업종 취업자는 퇴직사의 재직증명발급 시 자연스럽게 각서 받고 이를 문공부에 제출케 하여 간접적으로 순화효과를 기하고 취업허용을 구실로 다시 한번 언론인들을 정부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자료 51쪽).

이상에서 소개한 것처럼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는 광주항쟁 당시 신군부에 반기를 든 언론에 대한 통제를 내란 범죄 수준에서 자행했다. 이로 인한 언론의 상처는 건국 후 최대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부와 국회는 1980년 언론투쟁을 광주항쟁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문제에 대해 아직도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이는 이번 기무사 문건에서 보듯 광주 정신을 폄훼, 왜곡하면서 광주를 지역 민주화 운동으로 축소하는 것과 함께 호시탐탐 국헌을 문란케 할 범죄를 획책하는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자유언론실천재단(http://www.kopf.kr)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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