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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희숙 여사 영전에.. “어머님의 눈물 기억하겠습니다”

기사승인 2018.07.02  17: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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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 의문사 조사관이 회고하는 김희숙 여사.. ‘5년만 더 살게 해달라’ 기도한 이유

재야인사 고 장준하 선생님의 부인, 김희숙 여사님께서 2018년 7월 2일 오전에 소천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분이기에 더욱 그 애도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 김희숙 어머님을 뵌 것은 2003년 7월의 일입니다. 당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2기 조사관으로 합격된 후 맡게된 사건이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풀어헤치기 위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사건 속을 뛰어 다녔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건의 실마리를 잡고자 동분서주하던 그때, 묵묵히 미소로 저를 다독여 주던 그 분, 바로 김희숙 어머님의 존재였습니다.

단 한번도 다그치시거나 조사단을 원망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매양 뵐 때마다 “힘들지요? 사건이 워낙 오래되고 복잡해서 누가 해도 힘들 거예요.”라며 오히려 조사관인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어머님 당신이 살아온 그 팍팍한 삶의 여정을 안다면 이런 어머님의 모습은 흔한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제가 제일 먼저 떠올린 모습입니다.

어머님은 ‘위대한 애국자의 위대한 아내’셨습니다

1975년 8월 17일, 황망한 전화 한 통으로 어머님은 남편 장준하 님의 비극을 알게 되셨지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괴 남자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상대방은 “약사봉에서 장 선생이 크게 다쳤으니 어서 오라”는 말만 남긴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어 택시를 대절하여 막내 아드님 장호준 목사와 함께 어머님은 사건 현장으로 달려 가셨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지금의 장호준 목사는 아버지를 찾으러 올라가는 약사봉 계곡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내 아버지를 살해한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로 포효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길을 안내하던 경찰마저 함께 울며 위로했다고 조사 과정에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지경에도 어머님은 달랐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저는 어머님의 현숙함에, ‘위대한 애국자의 부인은 그 기품 역시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통상의 부인이라면 남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통곡부터 하며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통상의 사람들 반응이지요.

하지만 어머님은 그런 통상의 것을 뛰어 넘으셨습니다. 계곡을 오르기 전, 먼저 가까운 지물포를 찾아가 흰 광목천과 초부터 구입하셨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제 남편이 떠났다면 그 남편의 시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냉정한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하신 어머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1967년에 남긴 이  한 장의 사진도 어머님의 기품이 어떠한지 느끼게 합니다. 박정희 독재 정권하에서 남편 장준하 선생님은 모두 9번 연행되고 3번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국가원수 모독죄로 남편 장준하 선생님을 박정희 독재 권력에 빼앗기던 그날, 어머님은 감옥으로 끌려가는 남편 장준하 선생님을 배웅하면서 저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품있게 넉넉한 미소로 남편을 배웅했습니다. 마음속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기셨을 텐데도 독재자 권력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끌려가는 남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어머님은 의연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어머님이 계셨기에 남편 장준하 선생님은 이후 한 점의 물러섬 없이 정의를 위해 싸우실 수 있었겠지요. 이 모든 것이 어머님 덕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각나는 것은 지난 2013년 2월의 일입니다. 그때도 그랬지요. 박정희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식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 조차도 이런데 어머님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길을 나섰습니다. 어머님을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아내와 함께 댁으로 찾아 뵌 날, 어머님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환한 미소로 저의 내외를 받아 주셨지요.

어머님에게 전날부터 고아온 사골 국물을 건넨 후 도란 도란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울 때였습니다. 그날 저는 어머님과 나눈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그 사연,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5년만 더 살게 해달라던 기도..

   
▲ 1975년 8월 22일, 남편 장준하 선생님을 파주 나자렛 묘원에 모신 후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아내 김희숙 여사님. 그날 이후 어머님의 생은 힘겨웠다. 그러나 그 기품을 잃지 않은 어머님. 어머님. 고이가소서.

“어머니. 이번 대선 결과를 보시고 가슴이 많이 아프셨죠?”

저의 말에 어머니는 예의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네. 가슴이 많이 아파서 혼났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가 “제 마음도 그런데 어머니야 오죽 하셨겠어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니, 저는 진짜로 그날 가슴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도 찍고 난리가 아니었다니까요”라고 하셨지요.

사실은 이랬지요. 어머니 말씀처럼 그날, 정말로 큰 일이 있었더군요. 대통령 선거 결과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그 시각에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극심한 흉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진단 결과 심장 쪽에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는데 다행히 악성 종양은 아니라고 했다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전하던 때였습니다. 그후 이어진 어머님과 담당 의사와의 대화였습니다.

“여자 의사가 하는 말이 손톱 크기 만한 종양이 있는데 안심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정말 손톱만 해요? 아니면 손마디 만 해요?”

생각지도 않은 어머님의 질문을 받은 여의사가 빙그레 웃었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약을 잘 드시면 별 문제없다”는 답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입니다.

“의사 선생님. 그 종양 크기가 얼마만하건 제가 부탁 좀 드릴게요. 제가 앞으로 5년은 꼭 살아야겠는데요. 앞으로 5년은 더 살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의 말씀에 의사는 살짝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왜 5년만 더 사실려고 그러세요? 더 오래 오래 사셔야지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님의 말씀에 저 역시 의아했습니다. 더 사셔야지 왜 5년으로 못 박아 말씀하셨는지 그때는 선뜻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어머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이었지요.

“만약 내가 지금 죽으면 저 세상에 가서 영감을 만날 거 아니요. 그때 내 영감이 나보고 ‘그래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누가 하고 있소?’라고 물으면 내가 차마 답을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앞으로 5년만 내가 더 어찌 산다면 그때는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할 거 아니요. 그럼 내가 저 세상에 가서 영감에게 ‘지금 대통령은 아무개요’ 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머님. 저도 약속 하겠습니다..

   
▲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국회의원과 재야인사로 싸워온 이 분 곁에서 함께 해 준 분이 부인 김희숙 여사님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하루 하루가 안타까웠습니다. 이러저러한 자리를 통해 어머님을 뵐 때마다 부디 5년만, 5년만 하며 저 혼자 마음속으로 기도했던 이유입니다. 그 사이 사이 어머님의 건강이 자꾸만 나빠지신다는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혹시나 어머님이 5년을 기다리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해서 마침내 지난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시대가 열렸습니다. 저는 민주정부 3기 수립의 기쁨보다 사실은 어머님이 계실 때 우리가 원하는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기쁨이 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어머님이 저 세상에 가셔서도 남편, 장준하 선생님에게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문재인이요”라고 당당히 전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떠난 후 여러 어려움도 있었지만, 당신 정신 이어받아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평화적인 조국을 만드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단 말이오.”라며 당당하실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어머님. 이 모든 길 위에서 어머님의 자녀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아버님의 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장남 장호권 선생님을 비롯하여 호성, 호준 아드님이 매양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들 곁에 계셔 주심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지켜주신 남편 장준하 선생님의 정신이, 광복군으로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해방 후에는 독재에 맞서 싸웠던 그 기개를 저희가 배우며 함께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 세상에 가서는 두 분이 헤어지지 말고 행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결혼 초기, 장준하 선생님이 일본군에 징병되어 끌려간 후 탈영하여 광복군이 될 때까지, 그리고 다시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환국하고도 한동안 만날 수 없었던 기구한 신혼 생활. 그뿐인가요? 그후에는 박정희 독재와 맞서 싸우다가 9번 연행에 3번 감옥을 가야했던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야했던 어머님. 그 과정에서 흘리신 어머님의 눈물을 저희가 기억하겠습니다.

   

어머님. 그리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어머님의 평생 소원중 하나였던 남편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진실을 꼭 밝히겠습니다. 지난 2012년 8월 1일, ‘스스로 세상에 드러낸’ 장준하 선생님의 타살 의혹에 분명한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그동안 밝혀낸 사실과 새롭게 드러난 진실을 더하여 곧 이어질 진실화해위원회 2기 조사를 통해 명명백백히 하는데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다 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어머님 영전 앞에 전합니다.

어머님이 그러셨죠. 지난 2015년 11월 제가 쓴 책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북 콘서트때 둘째 아드님을 통해 저에게 전해주신 그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그날 장호성 선생님께서 북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어머님께서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고 선생 행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냐”고 답하니 어머님이 환히 웃으시면서 “그럼 오늘 가서 내 말을 고 선생에게 꼭 좀 전해달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 말을 전해 주시는 장호성 선생님의 손을 제가 꼭 잡으며 “대체 어머님께서 제게 무슨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냐”고 여쭈니 “내가 나이 들어 늦둥이 아들을 하나 둔 것 같다.”며 “고 선생이 내 아들처럼 고맙다”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저는 머리가 숙여지며 숙연해 지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한 사람을 더할 나위없이 배려해 주시는 어머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고 어머님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김희숙 어머님. 어머님이 떠나가신 오늘의 이 슬픔을 무엇으로 전할까요. 부디 안녕히 가소서. 어머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고상만 국방‧인권전문기자

고상만 국방‧인권전문기자 rights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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