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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할 수 없는 전영기 중앙 칼럼니스트 ‘JP 평가’

기사승인 2018.06.25  08: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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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 최소한의 균형감각은 가지는 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다

“2004년 정계를 은퇴하고 지난 6·13 지방선거까지 나라의 원로로서 JP의 경륜과 지혜는 빛났다 … JP 인생에서 무엇보다 드라마틱했던 무대는 5·16이다. 육사 8기(1949년 입학)생. 소장 혁신 장교 그룹의 리더가 JP였다.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옹립해 3600명의 군인으로 정변에 성공했다. 총격전은 있었으나 사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은 세계사의 드문 정변이었다. 그는 ‘혁명은 숫자가 아니라 의지’라고 했다.” 

오늘자(25일) 중앙일보 4면에 실린 전영기 칼럼니스트 기사 가운데 일부입니다.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한 ‘평가’를 담았습니다. 하지만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JP 평가’ 기사에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JP가 ‘2004년 정계를 은퇴하고 지난 6·13 지방선거까지 나라의 원로로서 JP의 경륜과 지혜가 빛났던’ 것인지, 5·16 군사쿠데타를 ‘사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은 세계사의 드문 정변’이라고 저널리스트가 단정할 수 있는 것인지 –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조차(!) 오늘자(25일) 사설에서 “(JP가) 4·19 혁명으로 수립된 민주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것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며 최소한의 균형은 맞췄습니다. 

   
▲ <이미지 출처=중앙일보 홈페이지 캡처>

최소한의 균형성 잃은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의 ‘JP 평가’ 

하지만 중앙일보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JP 평가’는 사실상 ‘일방적 호평’ 일색입니다.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 역시 비슷한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는데, 중앙일보의 ‘JP 평가’는 그때 그 시절에서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JP 평가’ 기사의 문제점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현대사에서 JP의 업적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것이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80년 1645달러 → 2000년 1만841달러로 증가했다. 1960~80년대 산업화의 성공은 도시에 탄탄한 중산층 세력을 성립시켰다. 도시의 중산계층은 한국 정치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 (중앙일보 6월25일자 4면) 

“현실적 힘에 바탕한 실용주의 노선은 JP 철학의 핵심이다. JP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광복 20년 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타결 짓는 과정에서 JP는 가장 어려운 배상금 문제를 맡았다. 62년 가을이었다. 배상금 혹은 대일 식민지 청구권 규모는 처음 5000만 달러를 제시한 오히라 일본 외상과 일진일퇴 끝에 6억 달러로 낙착됐다(65년 협정 서명 때 8억 달러로 상향).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4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성공한 협상이라 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6월25일자 4면) 

전영기 칼럼니스트는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배상금 규모를 거론하며 ‘성공한 협상’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또 박정희를 도와 대한민국 근대화에 성공한 것을 JP의 업적으로 평가하며 이후 형성된 도시 중산층이 한국 정치민주화의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JP를 둘러싼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흔적이 크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찌 됐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이른바 ‘3김 시대’를 이끈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의 ‘정치인 평가’는 최소한의 균형은 가져야 합니다. 공과를 구분하고, 공에 대해서는 온당한 평가를 하되 과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야 합니다. 한 정치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명복을 비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과’를 줄이고 ‘공’을 확대하는 식으로 표출되는 방식은 곤란합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의 ‘JP 평가’ 기사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상 ‘JP의 공적 활동’ 대부분을 ‘찬사 일변도’로만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자(25일) 조선·동아일보 사설과 비교해보면 그의 ‘JP 평가’가 얼마나 극찬 일색인지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아·조선일보조차 ‘JP 비판’하며 최소한의 균형은 맞춰 

“김 전 총리의 삶은 말 그대로 영욕(榮辱)과 명암이 엇갈렸다. 1961년 박정희 장군과 함께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4·19 혁명으로 수립된 민주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것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받은 배상금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한강 유역 다목적댐 등에 쓰이며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18년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로 지적되는 국민 인권의 후퇴에 그의 책임이 없다 하기 어렵다.” (조선일보 6월25일자 사설) 

“그에겐 흔히 우리 현대 정치사의 영(榮)과 욕(辱)을 함께한 정치인이란 수식어가 따르는 만큼 그의 공과(功過)를 두고도 크게 엇갈리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변화하는 기류에 너무 쉽게 순응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길 잃은 보수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JP가 우리 정치사에 남긴 흔적은 여러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좋든 싫든 그에 대한 엄정한 평가도 새로운 시대를 열 우리 정치의 몫으로 남겨졌다.” (동아일보 6월25일자 사설) 

사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의 ‘이 기사’는 ‘JP 평가’ 기사가 아니라 ‘JP 부음 기사’입니다. 오늘자(25일) 중앙일보 1면에 전영기 칼럼니스트가 쓴 ‘JP 기사’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JP가 영면하기 사흘 전인 20일, 서울 신당동 자택 2층의 JP 침실엔 정적이 흘렀다. 그는 영양제 주사기를 꽂고 있었다. 1시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신체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자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김종필 부음 기사(오비추어리)’를 읽어 줬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깜박였다. 잘 듣고 있다는 의사 표시다. 작고한 부인 박영옥 여사에게 브라우닝 시로 프러포즈했다는 대목에서 김종필의 한쪽 눈가에 방울 하나가 맺혔다. 거목(巨木)과 마지막 만남의 키워드는 사랑이었다.” 

전영기 칼럼니스트는 ‘JP 부음기사’를 미리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음 기사’라면 이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니냐고 반론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면, 저는 그래선 안 된다고 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반드시 명암이 함께 교차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치인 부음기사’라 해도 저널리스트라면 공과를 반드시 함께 다뤄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전영기 칼럼니스트가 JP에 대해 균형(?)을 맞춘 부분이 있긴 합니다. “그의(JP) 정치 일생은 2인자의 노회한 처세술로 점철됐다거나 기회주의 행태, 대세 추종주의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렇듯 평점이야 어떻든 JP의 선택은 전인미답, 역사의 새 장을 열곤 했다”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걸 균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널리스트의 ‘정치인 부음기사’도 이제 변해야 한다 

물론 한겨레가 오늘(25일)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정치인을 추모하는 것과 저널리스트의 정치인 평가는 달라야 합니다. 아무리 ‘정치인 부음기사’라 해도 공과는 분명히 구분해서 기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의 ‘JP기사’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 이후 많은 언론이 관련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저는 전영기 칼럼니스트의 ‘JP기사’는 그 많은 기사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기사’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정치인 추모’에 방점을 지나치게 찍으면서 저널리스트가 가져야 할 균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에 대해 저널리스트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준 역설적인 기사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로 23일 오전 8시15분 별세했다. 사진은 김 전 총리가 71년 당시 주한 미 대사관에서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리셉션에서 김영삼 의원, 한병기 의원과 대화하는 모습.<출처=운정재단 홈페이지, 뉴시스>

전영기 칼럼니스트에게 오늘자(25일) 한겨레 사설 가운데 일부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가 이런 평가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한 애도와는 별개로 ‘정치인 JP평가’는 한겨레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봅니다.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훨씬 크고 깊다. 육군 중령이던 1961년 그는 처삼촌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4·19 혁명을 짓밟고 인권 유린의 상징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 부장이 됐고, 공화당 창당을 주도해 유신독재의 길을 닦았다. 중앙정보부는 고문·조작, 정치 개입, 김대중 납치사건 등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전후로 4년6개월간 총리를 지냈다. 그가 대일 청구권 문제를 졸속 합의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6·3 시위’를 불렀고, 아직도 한-일 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987년 대선에 출마한 그는 이후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부추겼다. 특히 1990년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한 ‘3당 합당’은 거대 민자당 대 호남에 기반을 둔 평화민주당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영남보수 패권주의’를 굳어지게 했다.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그는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지역감정을 노골화하며 충청권 맹주로 정치 생명을 이어갔다 …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최고 훈장을 추서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통합의 상징성을 의식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종 결정에 앞서 ‘반대 청원’ 등에 담긴 비판 여론도 유념하길 바란다.” 

민동기 미디어전문기자

민동기 미디어전문기자 media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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