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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전 그날, ‘강간살인 사건’ 범인은 누가 조작했나

기사승인 2018.05.23  09:5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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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의 숨겨진 진실

   
▲ 정원섭 목사

제가 처음 이 분을 뵌 때는 2003년 어느 날 이었습니다. 낯선 분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제가 책을 낸 출판사로부터 번호를 받았다는 그 분은, 당시에도 연세가 상당한 노인 분이었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영문을 몰랐는데 그 분은 다짜고짜 제 집으로 녹용탕을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전북에서 사슴을 키우고 있는데 고 선생님에게 너무 고마워 마음의 답례로 보약을 전하고 싶다”는 겁니다.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 밑도 끝도 없는 말씀에 저는 다시 한 번 여쭸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해 드린 것이 없는데 뭐가 고맙다는 것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밝힌 사실은 그야말로 뜻밖이었습니다. 이것이 1972년 이른바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정원섭 목사님을 제가 처음 만난 사연입니다.

희대의 살인범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72년은 매우 음산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본격적인 독재의 길로 접어들며 유신헌법을 선포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국민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해 왔는데 박정희는 이런 선거 방식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 내가 때만 되면 거지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 표 줍쇼’라고 구걸을 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선출 방식을 만들라고 대통령 비서실에 지시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조직을 통해 간선 제도로 대통령을 뽑는 유신헌법의 선포였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응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는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찼고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 강원도 춘천에서 발생합니다. 바로 춘천 역전 파출소 소장의 딸이 강간후 피살된 채 논두렁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갔습니다. 그 엄혹한 시절에 감히 누가 파출소장의 딸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는지 연일 언론에서는 대서특필로 보도했습니다. 급기야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졌던 ‘박정희의 내무부장관’ 김현옥이 춘천까지 내려옵니다. 김현옥이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때문입니다.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40분경.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의 책임하에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5층짜리 와우아파트가 붕괴됩니다. 이날의 사고로 모두 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중상을 입게 되는데 박정희는 이 사고의 책임을 물어 김현옥을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하지만 김현옥이 버려진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김현옥의 불도저같은 업무 스타일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현옥은 이후 박정희 권력하에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하여 복귀하게 됩니다. 이번엔 내무부장관이 된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불도저처럼 내 달리던 김현옥이 내무부 장관이 된 상황에서 마주한 이 초미의 사건. 김현옥의 해결 방식은 앞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김현옥은 ‘10일 안에 무조건’ 이 사건의 범인을 검거하라고 경찰에게 지시합니다.

과연 경찰은 시간 내에 이 사건 범인을 잡아들일 수 있을까요?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장관의 지시, 그러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것이 현실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장관이 지시한 10일 내 검거 시기가 거의 다 지나가던 그때, 놀랍게도 경찰은 범인을 검거했다며 전격 발표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체포되었다는 이 사건 범인은 사건이 발생한 마을에서 만화 가게를 운영하던 30대 후반의 남자였습니다. 신학대학을 나온 후 교사를 하다가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난 후 실의에 빠져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그 시절의 남자, 훗날 목사가 된 정원섭씨였습니다. 경찰은 정씨가 여자 아이에게 욕정을 느껴 성폭행한 후 살해까지 이르게 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증인으로 정씨의 아들과 주변 마을사람들의 증언을 공개합니다.

그렇게 해서 범인으로 몰린 정씨는 이후 검찰에 의해 최고형량인 사형을 구형받습니다. 재판 내내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정씨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판부가 무기징역으로 형을 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대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을 확정받은 정씨는 이후 길고 긴 수감생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나는 억울하다.. 30년 만에 외친 진실

그후 정씨의 수감생활은 한편의 영화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자살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살해한 사실이 없는데 경찰과 검찰에 의해 사건이 조작되었고 끝내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절망으로 그는 죽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자살하고자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교도소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신대학교 선배이자 훗날 대표적인 여성운동가로, 또 국회의원이 되는 이우정 선배였다고 합니다. 그는 후배인 정씨를 보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원섭아. 억울하지? 그래서 죽고 싶지? 그런데 자살하지 마라. 네가 자살하면 너를 이렇게 조작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다. 죽지 말고 살아서 네 억울함을 밝혀라.”

정씨는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정신이 확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먼저 자신이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이용하여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군 복무시절 군악대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교도소 내 브라스 밴드를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영화 ‘친절한 금자씨’처럼 모범수로서 성실히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됩니다.

그런 정성과 노력이 교정당국을 감동시켰나 봅니다. 1987년 12월 24일이었습니다.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그 교도소 문을 열고 정원섭씨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가 수감된 지 만 15년 3개월 만의 특별사면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무기수 중 지금까지도 가장 빨리 나온 사례입니다.

이후 정씨는 다시 세상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시골인 전북 남원으로 내려가 사슴을 키우며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만 정원섭 목사님의 교회에서는 여타 교회와 달리 교인에게 헌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사슴을 키운 돈으로 무료로 교인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씨 참 좋은 목사로 살아가던 이 분이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석방후 그로부터 다시 십 수년이 지나가던 1999년의 일이었습니다.

1972년 사건이 발생한 후 수감과 은둔 생활을 합쳐 근 27년이 지나가던 그때, 정원섭 목사는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나는 살인범이 아니다”는 절규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나는 살해된 아이를 본 적도 없으며 내가 한 자백은 모두 경찰의 고문으로 만들어진 허위 자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억울함을 말하냐고. 왜 감옥을 나온 직후에 바로 말하지 않고 지금에서야 그런 주장을 하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믿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원섭 목사는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고문한 경찰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내 아들에게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오명만은 벗겨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진실을 바로 잡아 달라고 나선 것입니다.”

   
▲ 영화 <7번방의 선물> 중 한 장면. <사진제공=뉴시스>

밝혀진 진실.. 사라진 세월들

하지만 뒤틀린 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1999년 11월, 정원섭 목사가 서울고등법원에 제기한 재심 청구가 기각되었습니다. 이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즉각 항고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건 당시 정 목사가 범인이라던 증언들이 ‘사실은 경찰의 고문으로 만들어진 허위 증언’임을 밝혔음에도, 또한 경찰이 제시한 증거들이 전부 조작되었다는 것이 드러났어도 한번 내려진 판결을 바꾸는 것은 1999년 당시만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정원섭 목사가 저에게 연락을 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2003년, 인권운동가인 제가 직접 경험한 사례를 모아 쓴 책 <니가 뭔데>에서 저는 이러한 정원섭 목사의 사례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고, 그 대표적 사례로 정원섭 목사 사건을 들어 글을 썼는데, 이 책을 우연히 읽게된 정 목사께서 고맙다며 선물로 보약을 보내주고 싶다는 것이 이날의 통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연이 된 정원섭 목사와 저는 오늘까지 내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섭 목사의 비극이 끝난 것은 노무현 정부 시대로 접어들면서였습니다.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출발하면서 정 목사님의 사건이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진화위는 이 사건의 재심을 법원에 권고합니다. 자백도 허위이며 증언도 허위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건 발생 39년 만인 2011년 10월 정 목사님은 재심 결과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마침내 억울함의 옷을 벗고 길고 긴 악몽의 터널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연은 훗날 영화 <7번방의 선물> 모티브가 되어 천만 관객의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그런데 반가운 ‘또 하나의 소식이 들려 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재심 사건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검찰 과거사 위원회 진상조사단에 제가 진정했던 사건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72년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에 대한 검찰 재조사 민원이었습니다. 재심 결과 무죄로 밝혀졌지만 죄도 없는 정 목사님이 왜 범인으로 만들어 졌는지 그 경위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검찰 과거사 위원회 진상조사단에 이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고 다행히도 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 대상 사건으로 선정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휴대폰을 들었습니다. 이 반가운 사실을 목사님께 빨리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된 것은 잠시 후였습니다. 휴대폰 저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목사님이 아니라 그 분의 아드님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중이시며 현재 통화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드님에게 회복을 기원하며 “목사님의 의식이 회복되시면 검찰의 재조사 결정 소식을 꼭 전해 달라”며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드님이 생각지도 못한 반문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 말씀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드님은 “좋은 소식이기는 한데 어차피 재심으로 무죄를 확정받은 상황에서 왜 다시 사건을 재조사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주 오래 전 목사님이 저에게 들려준 한 가지 일화를 떠올렸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 지난 2월 6일, 법무부에서 열린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 연석회의에서 김갑배 위원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뉴시스>

언젠간 반드시 그날의 진실을..

1972년 10월 9일 밤이었습니다. 내무부장관 김현옥의 ‘시한내 범인 검거’로 초읽기에 들어간 경찰의 고문은 그야말로 무지막지 했습니다. 결국 고문 앞에 무너진 정원섭 목사는 허위 자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조사실 구석에 널부러져 있을 때 였습니다. 한편에서 경찰들은 축제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특명에 따라 범인이 검거되었으니 김현옥 장관 역시 매우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범인 검거에 공을 세운 경찰들에게 각각 훈장과 표창이 수여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고문에 참여했던 어느 경찰관이 정 목사님 앞에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훈장을 받는데 자기는 고작 표창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백은 내가 받았는데 왜 훈장은 다른 놈이 받냐”며 씩씩거렸다고 합니다.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런 경찰을 보던 목사님은 정말 그 순간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그때 목사님이 용기를 내어 한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 목사는 자신이 했던 이 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건 발생 후 무려 46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싸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이 보시오. 형사님. 지금은 형사님이 훈장을 받지 못해 불만스럽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흐른 후에는 내가 표창만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날이 반드시 올거요. 그러니 너무 그렇게 억울해 하지 마시오. 오히려 표창만 받아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반드시 올테니...”

이제 마침내 그 정의의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검찰 과거사 위원회 진상조사단의 조사가 바로 그 46년 전, 정 목사님의 예언을 현실화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밝혀 주십시오. 누가 지시했고, 누가 고문했으며, 누가 그 사실을 침묵했는지 온전히 밝혀 주십시오. 이를 통해 46년간 억울했던 한 인간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검찰 과거사 위원회 진상조사단을 믿습니다.

고상만 국방‧인권전문기자

고상만 국방‧인권전문기자 rights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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