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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투(MeToo)” 운동, 선정적 상품화를 넘어서

기사승인 2018.02.05  08: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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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 ‘뿌리 문제’에 대한 다각적 문제제기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 조규영 서울시의회 부의장 등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지방의원협의회 회원들이 1일 오후 서울시의회에서 서지현 검사를 응원하는 '미투 지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한 여성 검사가 상관인 남성 검사에 의한 성추행 사건을 공론화하면서 한국에 소위 “미 투(Me Too)”운동이 공공영역에서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운동이 확산되고 다양한 미디어에서 회자되는 방식을 보면서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우려를 하게 된다.

첫째, 이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피해자’로만의 위치가 아니라, 부당한 사건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하는 ‘주체자’로서 그려내야 한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은밀한 비밀을 이제서야 선정적으로 드러내는 ‘고백자’로서의 이미지로 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여성을 ‘고백자’ 로만 범주화할 때의 문제는 그 성추행/희롱/폭력이 ‘범죄’라는 사실을 외면하게 되며, 동시에 그 ‘고백’에서 호명되는 남성들은 단지 운이 나빠서 걸린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다. “미 투 운동”이 보도되는 방식을 보면, ‘여성-피해자, 남성-주체자’라는 전형적인 남성중심적 젠더 이해의 그 고정된 틀 속에서 문제제기 여성을 가두는 이미지들이 연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서지현 검사 사건과 같은 경우 “여검사 성추행 사건”과 같은 표제어가 아니라, “남성 검사에 의한 성추행 사건”으로 회자되어야 한다. 사건에서의 피해자가 아니라, 사건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을 ‘호명’해 내야 그 피해자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지 않게 된다. “미 투”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미 ‘피해자 의식(victim consciousness)’속에 침잠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체자 의식(agent consciousness)’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에게 일어난 범죄적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고백’은 피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행위를 한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공적으로 드러낼 때 차용되어야 하는 표현이다. 고발/고백이 아닌 주체자로서의 ‘비판적 문제 제기’의 등장이라는 점이 바로 “미 투”운동의 의미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둘째, 이 “미 투” 운동이 ‘남자 대 여자’의 문제라는 ‘단순 요인적 접근’ 방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서지현 검사 사건을 단지 ‘남자’ 검사가 ‘여자’ 검사에게 성추행을 행사했다고만 이해할 때, 이 문제가 지닌 매우 복합적인 다층적 권력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어느 사건이든, 가해자-피해자만의 권력관계가 남자-여자라는 구도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나이, 직급, 경제-정치-종교적 권력의 문제 등 다양한 권력 구조가 작동하게 되며, 동시에 그러한 폭력적 상황을 묵인하고, 동조하면서 가해자의 편에 서있는 이들의 존재가 있기에 그러한 피해사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가능했었다. 따라서 “미 투”운동에서 드러나는 성폭력사건들을 포함해서 여타의 폭력사건들을 접근할 때, 복합적인 ‘권력’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그 ‘권력의 교차성’에 대한 복합적인 분석이 이 “미 투” 운동을 다루는 데에 동반되어야 한다. ‘남자 대 여자’라는 단순요인적 접근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소위 ‘빙산의 일각’만을 다루는 표피적 접근을 하는 것 일 뿐이다. 이러한 성폭력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방안, 그 성폭력의 피해자가 이중 삼중의 피해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인식의 확장, 또한 그러한 성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중증의 책임성의 문제도 드러내져야 한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은 그 양태가 어떤 것이든, 자신이 그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어쨌든’ 그 우월성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권력은 젠더권력만이 아니다. 신체권력, 나이권력, 직급권력 등 다양한 양태를 지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 사회 또는 집단이 지닌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에 대한 이해의 결여, 그리고 남성/여성/트랜스 젠더 등 다양한 모습의 ‘타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과 평등성에 대한 이해가 부재할 때, 사람은 자신이 지닌 어느 한 종류의 권력이라도 움켜쥐면서 그 권력을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타자를 향해 행사하게 된다. 성폭력 사건은 ‘남자 대 여자’라는 ‘생물학적 권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젠더 권력/나이 권력/직급 권력/관계 권력 등이 교차되면서 ‘성폭력’이라는 비정상적인 ‘범죄적’ 행위가 한국적 ‘관행’으로 ‘정상화’ 되어 온 대표적인 예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인 2월 2일 자 한국 뉴스를 보니 이 “미 투” 운동에 대한 뉴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뉴스들이 나온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각기 다른 것 같은 이 갖가지 뉴스들은, 사실상 깊숙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 권력의 남용이 빚어낸 사건을 포함하여,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MBN의 기자들을 퇴장시키고 출입금지 시키라고 명령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런가 하면 취업현장에서는 출신학교와 인맥이 강력한 기준점으로 작동되어, 지원자들의 면접 점수까지 조작하면서 취업 결정이 좌우된 뉴스가 나온다. 그뿐인가. 새로운 당을 ‘미래당’이라고 명명하면서 그 당의 공동대표는 공자의 “정명 순행(正名順行)”을 인용하는 뉴스가 나온다. “좋은 이름은 만사가 잘 된다”는 의미라며 공자를 인용하는 새로운 당의 공동대표가 생각하는 그 ‘미래’란 도대체 어떤 미래일까. 어떠한 정치철학이나 지도자로서의 미래 세계 구상에 대한 생각은 부재한 채, 한국사회에 나이 차별, 성차별, 신분 차별, 직급 차별 등 다층적 차별문화를 양산하고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 유교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공자’를 인용하면서 “좋은 이름은 만사가 잘 된다”는 공허한 거대 서사를 외치는 그 새로운 당의 이름이 ‘미래당’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사회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느끼게 한다.

언어표현들은 한 사회의 가치관과 관계방식을 담고 있다. 소위 진보의식을 가졌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고수되고 전수되는 ‘선배-후배’, ‘상사-부하’ 등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존댓말과 반말이 존재하는 한국어는 그 표현방식에 의해서 다양한 관계들이 권력 관계로 전이되면서 그 관계적 위계주의를 고착시킨다. 나이, 젠더, 출신 학교, 직장/단체에서의 직급 등에 의하여 그 위계성이 바로 설정되는 의식구조를 근원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지극히 위계주의적 토양을 근원적으로 바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층적 예민성이 요구되는 ‘평등과 존엄’에 대한 인식이 정치, 경제, 교육, 종교 현장에서 제도화되고 실천되기란 참으로 요원하다. 한국사회의 지독한 질병인 인권감수성의 부재, 권력남용의 문제는 어른-아이, 남성-여성, 선배-후배, 상사직원-부하직원 등 끝도 없는 위계적 관계의 사다리를 곳곳에 설치하는 문화이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상대방의 ‘나이’를 묻는 행위 자체가 ‘나이차별주의(ageism)’로 연결될 수 있기에 금기시 되는 소위 선진국 사회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상대방의 나이를 측정해서 ‘서열’과 ‘위계’를 설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 이 두 사회의 대중적 인권감수성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 2016년 11월 8일(현지시간) 투표를 마친 여성들이 수전 B. 앤서니의 묘비에 '투표했다(I voted)'라고 적힌 투표 인증 스티커를 붙이며 존경을 표했다. 앤서니는 1920년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도하며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한 사람이다. 사진은 앤서니의 묘비에 붙은 투표 인증 스티커. <사진제공=뉴시스>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던 미국에서 그 여성들은 그 참정권획득을 위해서 72년간 (1848-1920) 투쟁을 했다. 그런데 여성 참정권 요구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는 표면적인 참정권 자체만이 아니다. 더욱 근원적인 요구는 여성이 영원한 미성년자가 아니라,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평등한 인간’이라는 인식론의 전이를 요구한 투쟁과정이었다. 이 72년간의 치열한 투쟁과정을 거치면서 소위 ‘서구인’들은 평등과 자유의식의 확산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여성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상품화’되고 일시적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더욱 어둡다. 서구가 거친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권리를 확산하고자 하는 치열한 투쟁 과정 없이 모든 사람들이 참정권을 그저 거저 받은 한국사회는, 그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인간으로서의 평등성이 곳곳에 확대되고 인식되는 과정자체도 생략되었다.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서구의 교육방식과 정치제도를 도입했지만, 그 표면적 도입은 그 정치-교육제도화에서 ‘모든’ 인간 (아이, 어른, 여성, 남성, 부자, 가난한 자, 장애인, 비장애인, 내국인, 외국인 등)을 존엄한 존재로 보는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해인 존재론적 평등성에 대한 인식론적 전제들은 도입하지 않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서구화’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대사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 즉 ‘모든 인간의 평등, 자유, 권리’를 확장하는 것으로서의 정치와 교육의 가치가 교육, 정치, 문화, 종교 등 공적 영역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적 영역에서도 논의되고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사회가 확보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 연대’라는 민주주의 가치의 제도화는, 우리가 인정하든 하고 싶지 않든,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서구에서 나왔다는 것을 반박할 수 있는 이론적/실천적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다만 탈식민주의 이론가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의 지적대로 서구는 부단한 혁명과 개혁과정을 거쳐서 스스로가 창출해 온 위대한 인류의 보편 가치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서 그 위대한 가치와 정신을 스스로 배반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 오류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가 만든 인권개념과 민주주의 가치가 지닌 중요한 의미까지 맹목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사건을 다룬 JTBC의 뉴스룸에서도, 여전히 남성 앵커와 여성앵커의 생물학적 나이의 불균형이 ‘당연한 설정’으로 ‘정상화’되고 있다. 여성 전문인들은 그 전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 몸에 그 우선성이 적용되는 남성중심적 시선과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그 뉴스룸에서 성추행사건을 다루는 ‘진보성’은, 가부장제사회의 지독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뉴스 프로그램이라는 곳에서, 그리고 성폭력의 문제와 “미 투 운동”을 대변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그 뉴스룸에서 조차, 여성이 검사, 앵커, 교수, 작가, 회사원, 승무원 등 무슨 일을 하든지 ‘어쨌든 여자(somehow woman)’라는 가부장제적 가치가 은밀하게 그러나 매우 강력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평가할 때, 그들의 전문가로서의 전문성이 아니라, 결국 ‘외모’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성차별적 가치가 성폭력의 피해자를 대변하고자 하는 그 공간에서 조차도 ‘자연적인 것’으로 ‘자연화’되고 있다.

여자가 “머리 나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못 생긴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농담’이 사실상 농담이 아닌 뿌리 깊은 성차별적 가치의 선언과 기준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이 “미 투 운동”을 성심껏 보도하는 그 바로 현장에서 본다. 남성의 주름은 연륜과 지혜의 결집으로, 여성의 주름은 가임기가 지난 추한 “비여성(unwoman--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인 <하녀의 이야기(The Handmaid's Tale)>에 등장하는 표현)”으로의 전락으로 간주하는 지독한 남성중심주의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답습을 이 ‘진보적’ 미디어에서도 그대로 보게 된다. 남성 앵커는 생물학적으로 60대가 되어도 오직 그 전문성으로 평가되지만, 여성 앵커들이 30대를 훌쩍 넘게 될 때, 이들 저널리스트들이 설 공적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주 앵커’는 남성이며, 여성 앵커는 그 남성 곁에서 제 2등 시민으로서 ‘예쁘고 젊은 보조자’로 설정되는 것은 한국사회에 숨 쉬는 공기처럼 곳곳에 확산되어 있는 여성비하, 여성혐오, 여성 폭력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미 투 운동”이 표피적이고 선정적인 (sensational) 상품으로 소비될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한 다층적 접근과 해석을 동반하면서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JTBC 뉴스룸과 같은 매체에서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앵커에게도 그들의 ‘생물학적 몸’이 아니라, 그 ‘전문성’이 앵커로서의 우선적 평가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라도 분석된다면 얼마나 신선한 변혁적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성추행/성폭력/성희롱의 표피적 사건들의 뿌리는 바로 여성을 언제나 ‘보조자’로 보고, ‘열등한 사람’으로 보는 이 ‘여성혐오’적 가치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뿌리 문제(root problems)’에 대한 다각적 문제제기가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그 때 비로소 “미 투 운동”이 일시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으로 상품화되어 소비되는 위험성을 넘어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JTBC 같은 미디어에서 “미 투 운동”을 계기로 비판적 자기분석과 성찰을 하면서 적어도 그 문제점에 대한 ‘공적 고백’이라도 하는 계기로 전환되기를 나는 바란다. JTBC 같은 미디어에서 “미 투 운동”을 계기로 이러한 남성중심적 가치제도와 실천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다층적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정치, 경제, 종교, 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등 한국 사회 거의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치열한 비판적 분석과 문제제기로 이어지는 것--내가 희망하는 “미 투 운동”의 목적지점이다.

* 이 글은 미국 텍사스 크리스쳔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것으로, 본인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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