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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민들이 꿈을 버리거나 사생활을 희생하거나 질낮은 일자리에 맞춰야 되나”

기사승인 2016.05.22  10: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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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 포퓰리즘’ 슬로건 자체가 포퓰리즘…돈 부족 문제 아냐”

일과 복지

일은 무엇일까? 난 타협이라고 본다. 개인적인 꿈과 사회적인 요구와의 타협.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활동이 있지만 사회에서는 정해진 일자리를 채워야 된다. 개인적인 꿈이 사회적인 요구와 같다면 최적의 타협이 이뤄진다. 하고 싶은 활동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문제는 이렇게 이상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란 것이다.

제대로 된 일자리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면 꿈을 버려야 되고, 이제는 꿈을 꾸는 사람도 드물어서 사회의 개선과 진보에 꼭 필요한 창의성은 희귀해진다. 이런 악순환은 한국의 슬픈 현실이다. 모두 안타깝다고 하면서도 우리 경제의 현실이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슬픈 현실에 대해서 좀 더 깊숙이 생각해보자.

   

한국의 슬픈 현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엄청 많이 한다. 한국만큼이나 일중독 현상이 심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면서 계속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는 고용시장의 극심한 양극화의 결과다. 안정적으로 충실하게 일하는 정규직 근로자가 있는 반면 다른 편으로는 일자리가 아예 없거나 파트타임 알바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방황하는 비정규직자도 있다.

조금 더 살펴보자.

열일하는 정규직자 :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면서 시험 준비와 스펙 쌓기에 몰두했다. 버티고 또 버텨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드디어 인생의 목표였던 정규직에 골인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회사의 생존이 마치 자신의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일하게 된다. 안전하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자신이 겪었던 치열하고 고달팠던 경쟁 과정들이 위로가 되고 소중히 얻은 정규직을 확고하게 해준다. 그래서 매주 60시간씩 근무하면서도 무조건 수긍하며 사생활까지 희생하는 것이다. 정규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인 복종의 수준이다. 사생활을 어느 정도로 포기해야 돼서 힘들지만 경제적인 안정과 사회적인 역할의 인정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버틸만하다.

방황하는 비정규직자 : 여기도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열심히 해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규직으로 올라가기엔 스펙이 조금 모자라다. 족보, 학력, 경력, 능력 아니면 그냥 충성심이 부족해서 비정규직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다. 사생활은커녕 복지 혜택도 없고, 안정도 없고, 마냥 버틸 수밖에 없다. 여기는 자발적인 복종이라기보다는 강제적 복종이겠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쉽게, 그리고 곧바로 대체될 수 있는 일손이기 때문이다. 동경의 대상인 정규직이 언젠가 될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고용시장의 예비군이 된다.

무직자 : 이 계층은 광범위하지만, 공통점은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육아와 집안일을 하는 주부, 열심히 일했지만 정리해고로 쫓겨난 50대의 실업자, 까다로운 서비스업의 자리를 채워주는 장기 알바생,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예술가, 가난하게 살지언정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에 몰두하는 이상주의자, 아무리 노력해도 일자리가 없어 집에만 있는 백수, 등등. 사회는 이들을 아웃사이더로 규정한다. 여가시간도 있고 어떤 회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약자이기 때문에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오히려 가족이나 친구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간혹 사회적 부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 고용시장의 문제는 뚜렷해진다. 양극화로 인해 일은 불균형적으로 분배돼 있다. 이미 포만감에 가득 차있는 사람들은 더 먹길 원하고 배고픈 사람들은 참으라는 상황이다. 이것은 한국 고용시장의 슬픈 현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일주일에 60시간씩 근무하면서 사생활까지도 포기해야 하지만, 덕분에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는 정규직자. 정규직을 꿈꾸며 자신의 처지를 기꺼이 감수하는 비정규직자. 비록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한 가족의 건강과 복리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헌신적으로 하는 주부. 가족이나 주변인들로부터 매일 잔소리와 정신 차리라는 볼멘 소리를 듣지만 자신만의 열정으로 이상향에 몰두하겠다는 예술가나 이상주의자. 이렇듯 현실이 아무리 슬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현실의 부당성을 부정해선 안 된다.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해야 된다. 웃으면서 해도 좋다.

   
▲ 옆집 예수는 취직했다더라

양극화의 부당성

이런 양극화 현상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누가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고용시장의 양극화는 불가피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다. 1987년부터 민주화가 되었지만 역대 정부는 정권에 관계없이 경제 세계화를 위해 재벌 앞에서 무릎 꿇고 경제 주권을 포기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신자유쥬의의 파도였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무엇인가? 경제를 키우려면 세계화에 참여해야 한다. 즉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품을 생산하는 나라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경쟁력을 키워야 되고 자본도 끌어들여야 한다. 이 새로운 과제의 담당자는 정부가 아니라 대기업이다. 정부의 새로운 역할은 국가를 인질로 잡아두는 대기업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있다. '세제 혜택을 안 주면 투자를 줄이고 일자리 창출을 줄이겠다', '친기업 노동법을 안 해주면 노동력 보충을 다른 나라로 이전한다', 뭐 이런 식으로 정부에 압박을 준다. 정부 쪽에서는 IMF 위기 때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들을 받아들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대기업과 이해의 일치로 이런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리고 그 조건들 중에는 고용시장의 유연화가 포함돼있다.

그래서 정부가 노동법을 건들기 시작했다. 더 쉬워진 정리해고, 길어진 노동시간, 악화된 근로 조건, 비정규직화, 최저 임금의 하향 평준화, 반노조 성향 등등. 근로자들을 보호해주는 규제를 최소화함으로써 고용시장을 더 유연하게 만든다는 명분아래 양극화를 시켰다.

이는, 부당하다.

경제 활성화의 모든 부담을 근로자들한테만 떠넘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시키려면 세계화에 참여해야 되고 세계화에 참여하려면 경쟁력을 키워야 된다. 그리고 경쟁력을 키우는 데에 고용시장의 유연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치자. 이 전제들은 문제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하자.

그럼 왜 근로자들만 이 유연화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경제는 재벌들만의 '사적재'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을 위한 '공공재'다. 그러나 실제로 재벌들이 창출하는 어마어마한 이익들은 자본소득으로 사유화되는 반면에 이런 사적 이익들을 얻는 데에 기여해주었던 유연화는 결국 국민들의 불안정으로 사회화된다. 경제성장이 중요하니 세계화가 불가피하니 어쩌니 해도 고용시장의 양극화는 어떻게 보든 부당하다.

   

 

해결책 : 보편적 복지와 근로시간의 감소

한국의 이런 부당한 현실을 바꾸지 않고서는 국민들은 여전히 꿈을 버리고 사생활을 희생하며 가치가 낮은 일자리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만 몰두할 것이다.

정해진 시장 경제 안에서 어떻게 고용의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근로자들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보편적인 복지제도와 근로시간의 감소.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시장 경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근로자 삶의 질을 분명히 향상시킬 수 있다.

      1. 보편적인 복지제도

복지제도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다. 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소득 일부를 세금으로 빼앗고 일을 안 하는 사람들한테 퍼주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들을 부양해주는 제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연결돼 있다. 가족의 차원에서 보자. 누군가 가사의 역할을 맡기 때문에 다른 한 명이 마음 편하게 일하러 나갈 수 있다. 예술가나 이상주의자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역할을 한다. 일에 지친 사람들을 예술로 위로해주거나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거나 꿈을 꾸게 해주는 역할 말이다. 심지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백수도 그렇다. 왜냐? 일자리는 제한 돼 있고 그 경쟁의 낙오자가 있기 때문에 정규직을 차지하는 승자가 있을 수 있다. 낙오자와 승자는 경쟁이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렇듯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직접적으로 총생산에 기여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는 모두 연결돼 있다. 따라서 보편적인 복지제도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들을 부양해주는 제도가 아니라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다 같이 생산하는 부의 정당한 재분배다.

보편적인 복지는 차별 없이 모든 국민들한테 기본적인 복지를 보장해주는 제도다. 취지는 고용의 안정성이 없어도 인생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용시장이 더 이상 제공할 수 없는 안정성은 국가가 제공해준다. 공교육, 국민연금, 실업수당, 최저임금, 주택지원, 사회보장제도 등등, 전 세계적으로 제대로 된 복지를 제공해주는 사례가 많다. 이런 보편적인 복지를 보장할 수 있다면 근로자들은 그만큼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식들의 사교육비나, 자신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서 죽도록 일만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인생의 기반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착취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보편적인 복지제도는 복지 자체 때문에 좋다기보다는 근로자들과 고용주간의 협상에 힘을 불어넣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보편적인 복지를 통해서 고용주가 강제권을 잃게 될 만큼 근로자의 자유가 생길 것이다. 대기업들이 보편적인 복지제도보다 사내복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2. 근로시간의 감소

공식 통계로 보면 한국은 근로자당 평균 연 2,100시간, 전문가들에 의하면 실제로는 연 2,500시간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연1,400 시간과는 비교도 안 되고 미국이나 일본의 연1,750 시간보다도 훨씬 많다. 혹자는 '당연히 선진국이랑 비교하면 안 된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무슨 기준으로 한국이 선진국이 아니란 것인가? 한국의 '후진국 콤플렉스'는 거꾸로 전환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은 선진국이 아니어서 일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대문에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싶다. 경제와 사회의 발전은 정해진 시간에 두 배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생산량에 두 배로 근무시간을 감소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관점의 문제다.

   

▲ Hours workedTotal, Hours/worker, 2013
(Source: OECD Hours Worked: Average annual hours actually worked)

여가 시간도 없고 삶의 질이 나빠지는데 생산성이나 경제성장이 높아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앞서 말한 대로 양극화로 인한 일의 불균형적 분배의 자연스러운 해결책은 일의 재분배다. 일에 지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일주일에 40시간만 근무하는 건 어떨까? 현실성이 없다? 현 근로기준법 제 50조 제1항은 ‘1주 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 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이미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많기 때문에 실제적인 시행이 어렵다. 법은 있지만 사문화됐다. 주 40시간 근무제를 마련하려면 정치의 의지가 필요하다. 고용시장의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 강화하려는 의지 말이다. 야근, 특근 등 주 40시간 이상의 모든 근무를 엄격하게 통제해주는 규제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행정처리도 정확해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강한 정치 의지가 있다면야 가능한 것이다.

시간제로 근무하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주 60시간을 열심히 일해도 월급이 낮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40시간만 허용하는 것은 생계에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근로시간 규제를 위해서는 구매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최저임금의 상승도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근로시간 감소와 함께 보편적 복지제도를 확립한다면 아이들의 학비나 노후 준비 등 부가적인 비용이 줄어드는 만큼 구매력 또한 높아질 것이다. 구매력이 높아지면 소비를 하게 되고 건전한 소비를 통해서 내수가 활성화되어 침체된 수출 위주의 경제가 재기된다. 이렇듯 근로시간 감소, 최저임금 인상, 보편적 복지제도 이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결말

물론 위와 같은 선순환을 너무 이상적으로만 보면 안 되지만 반면에 고려하지도 않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슬로건은 그만 외쳐도 된다. 그 말 자체가 포퓰리즘이다. 복지를 위한 예산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와 현 정부의 재정 적자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복지에 대해서는 돈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다. 4대강? 자원외교? 부자 감세? 제대로 된 복지제도를 확립시킬 수 있는 예산보다 어마어마하게 사치스러운 국가지출이었다.

   
▲ [김어준의파파이스#89] 홍종학 특강- 소득주도성장이 답이다

난 이제 한국도 제대로 된 보편복지 제도나 근무시간의 감소와 같은 정책을 서서히 마련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 가게 해주는 정치의 의지가 없다면 개꿈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이런 정치의 의지는 국민에서 시작돼야 한다. 10년, 20년이 걸리더라도 지금 당장 초석을 놓고, 일에 대한 집착, 중독, 복종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도 여유 있는 삶과 꿈을 버리고 평생 쉴 틈 없는 일꾼으로 살게 될 것이다.

먹고 살아야 되니까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일만큼 중요한 것도 많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 문화생활로 자기 계발하는 것, 운동으로 건강해지는 것, 취미로 인생을 즐기는 것. 우리는 인간으로서 밥만 먹고 살아야 되는 기계가 아니라 사생활, 자유, 건강, 꿈을 위해 사는 개인이며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자학은 그만해도 된다. 

※ 이 글은 딴지일보(http://http://www.ddanzi.com/)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K리S <딴지일보> 기자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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