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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노무현 사냥’, 저들은 이렇게 악랄했다”

기사승인 2015.02.26  12: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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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와 친분 이인규 중수부장의 노무현 죽이기.. 막장 언론플레이까지”

   
▲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단초가 된 시점이 있다. 검찰의 화살이 노 전 대통령을 정조준하기 시작한 2009년 3월이 바로 그때다. 2008년 7월부터 시작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탈세·비리 혐의 수사가 8개월 만에 ‘노무현 수사’로 전환된다. ‘박연차 수사’는 서곡에 불과할 뿐 사실은 노 전 대통령을 잡기위한 ‘사냥’이었다.

‘박연차 수사’ 가장한 ‘노무현 사냥’

2008년 7월부터 연말까지 진행된 ‘박연차 수사’는 ‘노무현 수사’에 돌입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앞잡이 역할을 한 이는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 그는 ‘국세청의 중수부’라고 불리는 조사4국에 특명을 내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세무조사에서 확보된 정보는 MB의 형 이상득 의원을 통해 청와대에 직보된 게 분명하다.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안 전 국장은 ‘2007년 여름 한 전 청장이 자신을 청장실로 불러 태광실업 세무조사와 관련해 1주일에 한두 번씩 대통령과 독대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관련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이렇게 진행된 ‘박연차 수사’는 그해 12월 말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하고, 박연차 회장에 대해서는 특가법상 조세포탈 및 뇌물공여 혐의를 물어 구속수감하는 것으로 제1막을 내린다.

2009년 3월은 노무현 서거의 ‘단초’

2009년 연초는 잠시 숨을 고르던 시기였다. 제2막인 ‘노무현 수사’에 착수하기 전에 한두 가지 손을 보고 전략도 정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연차 수사’의 물꼬를 텄던 한상률 국세청장이 1월 26일 그림 로비 의혹과 부적절한 골프회동 파문으로 사퇴하게 된다.

이런 한상률을 어떤 식으로든 ‘처리’하지 않고는 ‘제2막’을 열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한 전 청장은 사퇴한 지 한 달 뒤인 그해 3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야당은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이 있는 한상률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노무현 표적수사’를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냐고 반발했다.

   
▲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비슷한 시기에 대검 중수부장이 교체된다.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검찰 특수부 7대 보직 중 어느 한 곳도 거치지 않은 이인규가 대검 중수부장에 임명된 것이다. MB정부가 들어서자 마자 대검 기획조정부장으로 영전했던 그가 2009년 초 검찰 최고의 요직인 중수부장으로 옮겨 앉았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부임 두 달이 지난 2009년 3월 ‘박연차 탈세·비리 의혹’을 정관계 로비의혹으로 확대해 수사하겠다고 발표한다. 이때부터 ‘노무현 사람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된다. 추부길 청와대 비서관, 이광재 의원, 박정규 청와대 민정수석, 장인태 행자부 2차관, 이정욱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 송은복 김해시장, 서갑원 의원, 김덕배 의원,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노 전 대통령의 사위 연철호씨 등이 검찰에 불려갔으며 이중 추부길, 정상문, 이광재 등 핵심측근들은 구속 수감됐다.

MB와 친분 ‘이인규 중수부장’의 노무현 죽이기

노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강금원 전 창신섬유 회장 등도 검찰 조사를 받았다. 4월 중순부터는 검찰의 칼끝이 노 전 대통령의 가족을 겨냥한다. 노 전 대통령의 장남 노건호씨에 이어 딸 노정연씨 부부도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왜 중수부장이 이인규로 바뀐 뒤 ‘박연차 수사’가 ‘노무현 수사’로 전환된 걸까. 그 이유를 알기위해서는 이인규와 MB 측근였던 신재민 전 문화체육부 차관, 그리고 이들과 MB와의 관계 등을 짚어봐야 한다.

1999년 MB는 15대 총선 당시 자신의 선거참모였던 김유찬씨의 폭로로 선거법위반과 범인도피 혐의가 인정돼 의원직에서 밀려난다. 서울을 떠나 미국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MB는 이인규 검사와 인연을 쌓게 된다. 당시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신재민 전 차관이 워싱턴 영사관에 파견 나와 있던 이인규 검사를 MB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워싱턴에서 MB와 가까워진 이인규는 경동고 동문 인맥을 통해 이명박 캠프와 연결고리를 이어간다. 이상득 의원의 비서실장을 지낸 안국포럼 출신 장다사로 민정비서관과 MB의 측근이었던 정동기 전 민정수석 등이 경동고 동문이다. MB 대선캠프에서 정무기획팀장을 맡아 공을 세운 신재민은 이인규가 대검중수부장으로 영전할 무렵 MB정권의 실세 자리에 올라 있었다.

   
▲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완전히 짓밟기 위해 ‘막장 언론플레이’까지

이인규가 중수부장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친분관계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노무현 수사’가 그것이다. ‘박연차 수사’를 맡았던 박용석 중수부장(이인규 전임)에게 ‘노무현 표적수사’를 맡기기엔 뭔가 탐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 전 차장검사는 ‘국민을 위한 검찰’ ‘검찰다운 검찰’을 주장하는 꼿꼿한 검사 중 한 사람이었다.

‘노무현 측근과 가족’에서 노무현 본인에 대한 수사로 옮겨갈 무렵 ‘노무현 죽이기’가 본격화된다. 수법은 악랄했다. 그해 4월 22일 언론들은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1억원대 명품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서면질의서를 발송한 바로 그날이었다. 4월 30일 결국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고, 소환조사를 받은 지 며칠도 안 돼 ‘명품시계’ 얘기는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이 명품시계를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된 것이다.

이인규 대검중수부장은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의 지휘까지 무시한 채 관련수사를 생중계하듯 언론에 흘리며 칼을 휘둘렀다. 야당이 중수부장 등에게 피의사실공표혐의가 있다며 고발장을 냈지만 검찰은 관련수사를 흐지부지 끝내려했다. ‘논두렁 시계’는 ‘노무현 죽이기’를 위한 악랄한 언론플레이였다. 이 최악의 ‘칼질’이 있은 지 10일만에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다.

그랬던 이인규가 5년이 지나서야 ‘논두렁 시계’는 국정원의 공작이었다며 ‘언론플레이’의 장본인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지목하고 나섰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국정원이) 말을 만들어서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말했다.

   
▲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칼질’ 두 달 만에 쓰러진 16대 대통령

‘노무현 표적수사’를 주도했던 그가 죽음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돌리려 한다. 국정원의 소행이라고 치자. 국정원이 그럴 수 있도록 정보를 흘리고 눈감아 준 게 누군가. 대검 중수부 아닌가. 공범인데도 모든 잘못을 ‘동료’에게 전가하려 한다.

‘박연차 수사’가 ‘노무현 수사’로 전환됐던 2009년 3월 14일. 바로 그날 ‘노무현 수사’의 물꼬를 텄던 한상률은 해외로 나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인 15일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세무조사 무마 로비 등 상당한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도 검찰은 그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한상률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노무현 수사’는 이인규의 대검 중수부에 의해 ‘노무현 죽이기’로 진일보하며 광기를 더해갔고, 결국 ‘칼질’ 두 달 만에 노 전 대통령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국민리포터 ‘오주르디’ 블로그 바로가기)

국민리포터   오주르디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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